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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세상 식견/청랑 이슈 식견

중국의 서해 구조물 논란, 초라 왕조의 해상 패권을 떠올리다

by JWS 2025. 10. 23.

서해바다를 노리는 중국

서해 한중 잠정조치수역(PMZ)에 중국이 설치한 ‘선란 2호’ 구조물에서 중국 인력이 처음 식별되며 불법 설치·운용 논란이 증폭됐다. 이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사진에는 상단·중앙부에 각 1명, 해수면 계단부에 잠수복 착용 1명 등 최소 3명이 확인되고, 인근에 고무보트 1척도 포착됐다. 중국은 해당 시설을 ‘심해 어업 양식장’이라 주장해왔으나, 국내에선 거주·정박·잠수 활동 정황이 포착된 만큼 해양 주권 침해와 군사적 활용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의원은 남중국해 인공섬 사례처럼 서해 ‘내해화’ 시도일 수 있다며 “비례 대응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중국은 2018년 ‘선란 1호’에 이어 2023년 ‘선란 2호’를 세웠고, 2022년에는 석유시추 설비 형태의 관리시설도 추가했다. 올해 초에도 추가 구조물 설치 정황이 정부에 포착돼 우려가 커졌다. 해양경찰청과 관계 부처는 법적 지위·안전성·항행장애 등을 종합 점검 중이며 외교 채널 문제 제기도 검토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PMZ 공동관리 원칙과 국제해양법(EEZ 충돌 시 잠정조치) 취지에 비춰 일방 설치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실시간 감시·증거 축적, 항행안전 조치, 국제 공조를 병행하는 ‘법·외교·현장’ 삼중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8월 중국 서해 구조물 선란 2호에서 중국 측 관리 인원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초라왕조, 스리비자야 핵심 거점  말라카 일대를 단숨에 정복하다

1025년, 남인도의 초라(Chola) 왕조는 해상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담한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라젠드라 초라 1세(Rajendra Chola I, 재위 1014-1044)가 이끄는 대규모 해군 함대가 인도양을 건너 동남아시아의 해상 강국 스리비자야(Srivijaya)를 급습한 것이다. 이 원정은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장거리 해상 작전이었다. 초라 함대는 치밀한 전략으로 스리비자야의 핵심 거점들을 차례로 타격했다. 첫 번째 목표는 북수마트라의 바루스(Barus)였다. 이곳은 향료와 장뇌(camphor) 교역의 중심지이자 인도양에서 말라카 해협으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다. 초라군은 바루스를 점령하여 재보급 기지로 삼았고, 이를 발판으로 더 깊숙이 동남아 해역으로 진격했다. 이어진 공격 목표는 스리비자야의 심장부였다. 수마트라 남동부의 팔렘방(Palembang)은 스리비자야의 수도이자 말라카 해협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다. 초라군은 이곳을 점령하며 스리비자야의 정치·경제적 중추를 마비시켰다. 동시에 젬비(Jambi), 말라유 반도의 케다(Kedah), 파나이(Pannai) 등 말라카 해협 주변의 주요 항만들도 연쇄적으로 함락시켰다.

라젠드라 초라 1세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왕궁 비문에 정복한 지역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비문에는 "카타함(Kataha, 케다), 팔라발감(Palavangam), 말라유르(Malayur, 젬비)" 등 14개 이상의 동남아 도시국가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체계적인 정복 작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초라군의 성공 요인은 우수한 해군력과 전술적 기동성에 있었다. 초라 왕조는 벵골만 연안에서 오랜 해양 전통을 발전시켜 왔으며, 대형 전함과 상륙 작전 능력을 갖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몬순 패턴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기와 건기를 활용해 신속하게 이동하고 적의 대응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스리비자야는 7세기부터 말라카 해협을 지배하며 중국-인도 간 중계무역을 독점해온 해상 제국이었다. 그러나 초라의 기습 공격 앞에서 그 해상 네트워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초라군의 항만 봉쇄와 주요 거점 점령은 스리비자야의 관세 수입원을 차단했고, 그들이 구축해온 해상 지배권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비록 스리비자야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그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말라카 해협의 해상 질서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초라 왕조, 중국과 교역루트 개척하며 해상권을 장악하다

초라 왕조의 말라카 원정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장기적인 해상 통제 전략의 시작이었다. 라젠드라 초라 1세의 진정한 목표는 약탈이 아니라 인도양에서 남중국해에 이르는 해상 무역로의 실질적 지배였다. 초라는 정복한 항만들을 단순히 파괴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대신 이들을 '상업-군사 복합 거점'으로 재편했다. 케다, 팔렘방, 파나이 등지에는 항만 시설과 함께 조선소, 보급창고, 군사 주둔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거점들은 초라 해군의 전진기지이자 타밀 상인들의 무역 중계지로 동시에 기능했다. 항만에는 타밀 상인 공동체(Tamil merchant guilds)가 정착했고, 그들은 현지 교역을 관리하며 왕실에 세금을 납부했다.

이러한 복합 시스템의 핵심은 상업과 군사력의 결합이었다. 초라 왕조는 해군력으로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상인들로부터 통행세와 보호료를 징수했다. 동시에 상인들은 초라 왕실의 외교 사절 역할을 하며 중국 송(宋) 왕조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약탈 경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해상 제국 모델이었다. 초라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성과는 중국과의 직접 교역로 개척이었다. 이전까지 인도와 중국 간 무역은 스리비자야를 중심으로 한 말라카 해협의 중계무역에 의존했다. 인도 상인들은 말라카까지만 오고, 중국 상인들은 말라카에서 물품을 받아갔다. 그러나 초라는 말라카 해협을 직접 통제함으로써 인도에서 중국까지 직항하는 새로운 항로를 열었다. 1033년, 라젠드라 초라 1세는 송나라에 공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송나라 기록에는 "초라국(注輦國)"의 사신이 조공품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외교적 형식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역 관계 수립을 의미했다. 초라의 항만들은 인도의 면직물, 향신료, 보석과 중국의 도자기, 비단을 교환하는 중계지가 되었고, 타밀 상인들은 남중국해까지 정기적으로 항해했다.이러한 해상 네트워크 확립은 문화적 파급효과도 가져왔다. 타밀 상인과 브라만 승려들이 동남아 각지에 정착하면서 힌두교와 산스크리트 문화가 확산되었다. 케다, 팔렘방, 자바 등지에는 힌두 사원이 건립되었고, 현지 왕조들은 인도식 통치 이념과 의례를 받아들였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동남아시아의 '인도화(Indianization)' 과정은 초라 왕조의 해상 진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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