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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세상 식견/청랑 이슈 식견

트럼프 젤렌스키 회담, 뮌헨 협정의 악몽이 되살아나다

by JWS 2025. 10. 24.

우크라이나 미국압박에 못이겨 영토 내놓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하며 러시아가 요구하는 영토 교환을 수용하라 압박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랐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경제가 건재하다고 언급하며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는 파멸될 것”이라 경고하고, 전선 표시 지도를 내던지며 돈바스 전역 양도를 요구했다. 로이터는 트럼프 대통령이 ‘영토 교환’과 ‘현 전선 동결’안을 재차 제시했고, 우크라이나가 거부하자 즉석 휴전안을 꺼냈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상 연설에서 “침략자에게 아무것도 내줄 수 없다”며 영토 양보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장거리 순항미사일 ‘토마호크’ 지원 요청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회담 전날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가 트럼프 대통령의 급격한 입장 전환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돈바스를 포기하면 러시아가 점령 중인 남부 일부를 반환하고 교전선을 동결하는 ‘완화된’ 교환안을 제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KGB 출신 푸틴 대통령의 언변·심리전이 트럼프 대통령에 다시 먹혔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만간 부다페스트에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양국 외교 수장이 정상회담 준비 통화를 예고했다. 이번 사안은 과거 뮌헨 조약이 떠오르게 한다.

(좌)우크라대통령 젤란스키 (우)미국 대통령 트럼프


체코슬로바키아 핵심요새 넘겨주며 히틀러와 일시적 평화 유지하다

1938년 9월 29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정상들이 모였다. 정작 운명이 결정될 체코슬로바키아는 회담장 밖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히틀러는 수데텐란트의 독일계 주민 300만 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을 요구하며, 이것이 "마지막 영토 요구"라고 약속했다. 문제는 수데텐란트가 단순한 국경 지역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핵심 방어 요새와 주요 공업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수데텐란트를 넘겨준다는 것은 국방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이 생생했고, 군사적으로도 준비가 부족했다. 체임벌린은 "수천 마일 떨어진 우리가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결정이"라며 항의했지만, 동맹국들은 협정을 거부하면 독일의 침공에 홀로 맞서야 한다고 통보했다. 결국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국토의 30%와 인구의 5분의 1을 잃었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방어선의 상실이었다. 요새를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언하며 환호를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영토 양보로 히틀러의 야욕을 충족시키고 전선을 동결시켰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뮌헨협정 당사자들 중앙 히틀러


히틀러 야욕 멈추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 빠르게 장악하다

히틀러의 "마지막 영토 요구"는 거짓말이었다. 수데텐란트를 얻은 후 독일은 멈추지 않고 약화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슬로바키아 내 친독일 세력을 부추겨 분리 독립을 요구하게 했고, 체코 정부는 내부 분열로 흔들렸다. 1939년 3월 14일,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하하 대통령을 베를린으로 불러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독일의 보호령이 되지 않으면 프라하를 폭격하겠다는 위협이었다. 심장 질환이 있던 프라하 대통령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의식을 잃었다가 독일 의사의 주사를 맞고 깨어나 굴욕적인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1939년 3월 15일, 뮌헨 협정 서명 후 불과 6개월 만에 독일군이 프라하로 진군했다. 체코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독일에 직접 편입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독일의 괴뢰 국가가 되었다. 히틀러는 약속을 완전히 파기하고 나머지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세계 2위 수준 무기 산업은 고스란히 독일 손에 넘어갔다. 스코다 무기 공장이 생산하는 탱크와 대포는 나치 독일의 전쟁 기계를 강화했고, 1939-40년 독일 전체 무기 생산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유화정책의 참담한 실패를 깨달았다. 체임벌린이 가져온 "우리 시대의 평화"는 6개월도 지속되지 못했다. 조약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작은 나라들은 대국의 보장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만약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켰다면, 체코의 강력한 요새선과 35개 사단의 군대, 막강한 무기 산업이 연합국 편에 섰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뮌헨 협정이 히틀러를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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