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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세상 식견/청랑 이슈 식견

캄보디아 스캠 구출 논란, 역사 속 청나라의 포용 전략을 떠올리다

by JWS 2025. 10. 21.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기를 친 범죄자들을 미얀마에서 구출했다?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캄보디아 로맨스 스캠(연애 빙자 사기) 조직에 가담했던 한국 청년 3명을 “구출했다”고 밝히며 논란이 확산했다. 김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지역 주민의 요청으로 안전대책단장 자격으로 현지에 가 캄보디아 고위 공무원·대사관 경찰·교민과 협력해 3명을 빼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들이 지인 소개·구직 광고를 통해 현지로 갔다가 숙소에서 여권·휴대전화가 압수되고 강압적으로 ‘작업(사기)’에 투입됐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양팔 문신 등 외형을 근거로 “가해자”라는 지적에 대해선 “강압 피해와 범행 가담이 공존할 수 있다”며 수사·처벌·재사회화를 국가가 순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구출자들이 초범이고 체류 2개월가량이었으며 일부는 어머니와 통화까지 했다고 부연했다. 일각에선 ‘구출’ 표현의 적절성과 정치적 과장 가능성, 사법 절차 이전의 면죄 인식 등을 문제 삼고 있다. 동시에 동남아 전역에서 확산한 사이버 사기 조직의 납치·감금 실태, 현지 당국의 단속 한계가 재조명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인형 해외 취업 광고 경계, 출국 전 안전정보 확인, 정부 간 합동 단속과 송환·수사 체계 고도화를 주문한다. 외교·치안 당국은 피해자 보호와 피의자 처벌을 분리해 처리하되, 강압·인신매매 여부에 대한 사실 규명이 관건이라고 본다. 사건의 실체는 귀국 후 수사와 사법 절차에서 드러날 전망이다. 이 사례를 보면서 청나라는 정성공 해상세력에 가담했던 무리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했는지 살펴봅시다.

[인천공항=뉴시스] 최진석 = 캄보디아 당국의 범죄단지 단속으로 적발돼 구금됐던 한국인들이 1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청나라에 대항한 정성공 해상세력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했지만, 바다에서는 여전히 명나라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정성공(1624-1662)은 중국인 아버지 정지룡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명나라 부흥을 내걸고 청나라에 맞선 해상 제국을 건설했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국성야(國姓爺)'라는 칭호를 받은 그는 서양에서 '콕싱가(Koxinga)'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정성공의 함대는 최전성기에 3,000여 척의 선박과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다. 이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니라 명나라 군제를 따른 체계적인 해상 왕국이었다. 대형 전함 '조선(鳥船)'을 중심으로 빠른 쾌선과 보급선으로 구성된 함대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지배했다. 육지에는 요새와 병영이 설치되었고, 엄격한 군율 아래 민간인 약탈을 금지하는 등 일반 해적과는 달랐다. 경제적 기반은 복건성, 광동성 연안에서 대만,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며 비단, 도자기, 차, 설탕, 향신료를 거래했다.

특히 일본과의 은(銀) 무역이 중요했고, 무역 독점을 통해 얻은 막대한 수입은 군사력 유지에 투입되었다. 1661년 대만을 점령한 후에는 농업 개발로 안정적인 식량 기반도 확보했다. 정성공 세력의 구성원은 매우 다층적이었다. 핵심은 명나라 황실에 충성하는 관료와 장군들로, 반청(反清) 이념으로 무장한 지식인과 무인들이었다. 그러나 실제 병력의 상당수는 생계형 가담자들이었다. 청나라의 가혹한 해금(海禁) 정책으로 생계를 잃은 어민과 상인들,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난민들이 정성공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일부는 자발적이었지만, 강제 징집되거나 반강제로 편입된 경우도 많았다. 1662년 6월, 정성공이 39세에 급사하면서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의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지만 조직은 내분에 휩싸였다. 동생 정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장군들은 파벌을 형성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명나라 부흥이라는 대의는 점차 현실성을 잃었고, 생계형 가담자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을 느꼈다.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면서 반청 운동의 전망은 어두워졌고, 조직의 균열은 깊어졌다.


가담자들 선별하여 청나라 백성으로 재사회화 시키다

청나라는 무력 진압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경책과 함께 회유책을 병행하며 정성공 세력 구성원들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펼쳤다. 투항자들에게 차별화된 조건을 제시했다. 핵심 장군과 관료에게는 관직과 봉토를 약속했고, 일반 병사에게는 사면과 토지 분배를 보장했다. 특히 생계형 가담자들에게는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청나라는 선별적 수용 원칙을 엄격히 적용했다. 핵심 강경파나 청나라에 큰 피해를 입힌 지도부는 배제했고, 투항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일부는 다른 투항자들을 설득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공로"를 입증해야 했다. 반면 강압이나 생계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일반 병사와 선원들은 관대하게 처리했다. 이들은 단순한 사면을 넘어 재정착을 위한 실질적 지원을 받았다. 재사회화 과정은 4단계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단계에서 투항자들은 무장 해제 후 임시 수용 시설에 머물며 역할과 가담 경위를 조사받았다. 핵심 지도부, 자발적 참여자, 강제 가담자, 생계형 가담자로 분류되어 각기 다른 처우를 받았다.

2단계에서는 청나라의 통치 이념과 법률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는 사상 교육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였다. 일부는 청나라 군대에 편입되어 재훈련받았고, 다른 이들은 농업이나 수공업 기술을 배웠다.3단계에서는 실질적인 재정착 지원이 제공되었다. 토지를 분배받거나 어업 허가를 받았고, 상업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원래 어민이었던 사람들에게는 해금령 완화 후 다시 바다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유능한 선원과 항해사들은 청나라 수군에 편입되었다. 정성공 세력의 해상 경험과 기술은 청나라에게도 필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4단계에서는 재정착 초기 투항자들을 감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되었고 점차 일반 백성으로 통합되었다. 1683년,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鄭克塽) 시대에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청나라 명장 시랑이 이끄는 함대가 대만을 공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랑은 원래 정성공의 부하였다가 배신하고 청나라로 투항한 인물이었다. 펑후 해전에서 참패한 정극상은 항복했고, 22년간 지속된 정씨의 대만 통치가 끝났다. 청나라는 승리 후에도 관대한 정책을 유지했다. 정극상은 사형되지 않고 북경으로 이송되어 작위를 받았으며 여생을 평온하게 보냈다. 주요 장군들도 대부분 항복을 받아들여졌고 일부는 청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일반 병사와 선원 수만 명은 대만에 남아 정착하거나 중국 본토로 돌아가 재정착할 기회를 받았다. 청나라는 대규모 유혈 사태를 피하고 안정적인 통합을 이루었다. 이 사례는 "주범은 엄하게, 종범은 관대하게"라는 선별적 처벌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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