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에서 예인 중인 러시아 잠수함
마르크 뤼테 나토 사무총장은 연료 누수로 수면 위로 떠올라 북해에서 예인 중인 러시아 디젤잠수함 ‘노보로시스크’를 두고 “절름거리며 기계공을 찾는 신세”라고 조롱했다. 나토는 앞서 프랑스 구축함이 브르타뉴 인근에서 이 잠수함을 추적했다고 밝혔고, 영국·네덜란드 해군이 영국 해협 통과와 북해 구간을 연이어 감시·추적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해당 함정이 지난달 지브롤터 해협에서 연료가 새어 예인됐다며 기술 이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러시아 측은 기술 장애를 부인하고 국제항행 규정에 따른 ‘무해통항’ 차원의 부상이라고 반박했다. 뤼테 총장은 “지중해에서 러시아 해군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졌다”며 현 상황을 러 해군 쇠락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전문가들은 해당 잠수함이 지중해에서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했을 가능성과 인원·장비 수송 시나리오를 제기한다.
한편 러시아 흑해함대는 우크라이나의 무인해상드론·미사일 공격으로 약 40% 전력이 손실된 것으로 알려졌고 기함 ‘모스크바’ 격침 이후 후방으로 후퇴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항모 ‘애드미럴 쿠즈네초프’는 예산 부족과 비리 의혹 속에 장기 수리 지연을 겪고 있다. 러 군 내부에선 항모의 유효성(무인기 중심 vs 원해작전 항공지원 필수)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안은 러 해군의 기술·유지·전력투사 능력 약화를 국제무대에 재확인시켰다는 평가다. 과거 강력한 해군력을 가졌던 바이킹 족은 스탬퍼드 전투이후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걸었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바이킹족
8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약 300년간, 바이킹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해양 세력이었다. 793년 린디스판 수도원 습격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그들의 원정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바이킹의 힘은 무엇보다 탁월한 항해술과 조선술에서 나왔다. 롱십이라 불리는 그들의 배는 얕은 물에서도 항해가 가능했고, 빠른 속도와 기동성을 자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바이킹들은 북해와 대서양은 물론, 지중해와 흑해, 심지어 북미 대륙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예측 불가능한 시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해안 마을과 수도원을 약탈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는 유럽인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바이킹의 활동은 약탈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노르망디 등 여러 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했고,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경제적 영향력도 확대했다.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9세기에 데인로라는 독자적인 지배 지역을 형성했고, 11세기 초 크누트 대왕은 북해 제국을 건설하여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했다. 전사 문화를 중시했던 바이킹들은 용맹함과 전투 기술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도끼와 검, 방패를 능숙하게 다루었고, 방패벽 전술을 통해 조직적인 전투를 펼쳤다. 이러한 군사적 우위와 해양 장악력은 바이킹을 당대 유럽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다
1066년 9월 25일, 잉글랜드 북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바이킹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대규모 바이킹 함대는 잉글랜드 왕 해럴드 고드윈슨의 군대와 맞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이 전투에서 하랄드 하르드라다와 그를 지원했던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 고드윈슨이 전사했고, 약 6,000명에 달하는 바이킹 병력이 전멸했습니다. 당초 300척이 넘는 선박으로 침공했던 바이킹 함대는 겨우 24척의 배만으로 귀환해야 했다. 이는 단순한 전술적 패배가 아니라, 바이킹 해양 세력의 구조적 붕괴를 의미했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이후 바이킹의 해양 투사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300년 가까이 북해와 대서양을 장악하며 유럽을 위협했던 그들의 원정 능력은 한계를 드러냈습다. 막대한 인명 손실과 선박 소실은 곧바로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고, 더 이상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여력이 사라졌다.
이 시기 바이킹의 쇠퇴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유럽 각국이 바이킹의 침입에 대비해 방어 체계를 강화했고, 해군 전술도 발전했다. 또한 바이킹 사회 내부에서도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전사 문화가 약화되었고, 정복지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점차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갔다. 노르만족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0세기 초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 후손들은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직후인 1066년 10월, 노르만 공작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했지만, 이는 더 이상 바이킹식 약탈이 아닌 봉건 군주로서의 정복이었다.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는 바이킹 시대의 마지막 대규모 원정이자, 북유럽 해양 세력의 급격한 전환점이었다. 이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약탈과 원정 대신 내부 통합과 왕국 건설에 집중했고, 바이킹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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