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문재인 정부 절차를 밟나
더불어민주당은 이상경 국토교통부 1차관의 유튜브 발언을 “부적절”하다고 규정하고 공식 사과하며 민심 수습에 나섰다. 이 차관은 “집값이 안정될 때 사면 된다”는 취지로 말해 서민 주거불안 현실을 몰각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배우자의 ‘갭투자’ 의혹까지 제기되며 여론 역풍이 커졌다. 당은 10·15 부동산대책 이후 혼선을 최소화한다며 공급 중심 기조를 강조하고 세제 개편 논의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보유세 강화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민주당 주택시장안정화TF는 “세제 논의는 하지 않는다”고 진화에 나섰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박주민 의원도 “보유세 인상은 직접적 안정 수단인지 의문”이라며 신중론을 폈다. 반면 진성준 의원은 “정치적 부담이 있더라도 용기 있게 접근해야 한다”며 세제·구조 처방 필요성을 제기했다. 당내 기류가 갈리는 사이 야권 전반은 ‘정책 일관성’과 ‘체감효과’를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일각에선 고위 당국자의 발언과 가족 재테크 의혹의 괴리가 정책 신뢰를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토부는 시장 교란 방지와 공급 가속화에 방점을 찍되 커뮤니케이션 원칙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영국도 프랑스와 오랜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세금을 통해 재정회복에 나섰다. 그러나 높은 세금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농노들은 한 인사의 한마디에 곡갱이를 들고 국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바닥난 재정, 국민 세금으로 채우다
14세기 후반 잉글랜드는 백년전쟁(1337-1453)의 장기화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막대한 군비를 요구했고, 왕실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국민에게 세금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377년부터 138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부과된 인두세(poll tax)가 그 핵심이었다. 인두세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역진적 성격에 있었다. 소득이나 재산과 무관하게 모든 성인에게 동일한 금액을 부과하는 이 세금은 가난한 농민일수록 상대적 부담이 컸다. 첫 번째 인두세(1377년)는 1인당 4펜스였으나, 세 번째 인두세(1380년)는 12펜스로 3배나 급증했다.
당시 농민 가구의 연간 소득이 1파운드(240펜스) 내외였던 점을 고려하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부과되는 인두세는 가계를 파탄 직전으로 몰아넣는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흑사병 이후의 경제 상황이 이러한 세금 부담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1348-1350년 흑사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가량이 사망하면서 노동력이 급격히 부족해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배층은 1351년 '노동자법령(Statute of Labourers)'을 제정해 임금을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동결하고, 농민들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는 것을 금지했다.
노동력 부족으로 협상력이 높아진 농민들에게는 생활 수준 향상의 기회였지만, 법령은 이를 강제로 억압했다. 징세 과정의 폭력성도 민심을 자극했다. 1381년 5월, 에식스 지역의 브렌트우드에서 세금 징수관 토마스 밤프턴이 세금 회피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소녀를 모욕적으로 검사하려 했고, 이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징수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봉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단순히 세금이 높았던 것이 아니라, 징세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 폭력성과 민중에 대한 모욕이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곤트의 말 한마디, 민중 분노 봉기로 표출되다
경제적 압박만으로는 대규모 봉기를 설명할 수 없다. 1381년 농민봉기가 전국적 저항으로 확산된 데는 지배층의 정치적 오만과 커뮤니케이션 실패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실질적 권력자였던 존 오브 곤트(John of Gaunt,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와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사이먼 서드버리(Simon Sudbury)는 민중의 고통을 경시했다. 곤트는 "세금을 회피하는 자는 왕권에 대한 반역"이라는 식의 강압적 언사를 사용하며 불만을 억압하려 했다. 서드버리 역시 세 번째 인두세의 설계자로서 세금 징수를 강경하게 추진했다. 이들의 태도는 민중에게 "우리의 고통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절망감을 심어주었다. 반면 명목상의 왕 리처드 2세는 1381년 당시 겨우 14세였다. 그의 미성숙함과 조정 내 엘리트들의 권력 다툼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국민은 전쟁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정작 나라를 이끄는 자들은 무능하고 탐욕스럽다고 느꼈다.
이러한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설교자 존 볼(John Ball)의 급진적 메시지가 큰 호응을 얻었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실을 잣던 때, 누가 귀족이었는가?"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는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논리로 봉건 질서 자체를 부정했다. 존 볼의 메시지는 단순히 세금 인하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 농노제 폐지와 사회적 평등이라는 혁명적 이상을 제시했다.1381년 6월, 에식스와 켄트에서 시작된 봉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와트 타일러(Wat Tyler)가 이끄는 수만 명의 농민군은 런던으로 진격해 존 오브 곤트의 저택을 불태우고, 사이먼 서드버리를 붙잡아 참수했다. 리처드 2세는 6월 14일 마일엔드에서 봉기군을 만나 농노제 폐지와 세금 감축을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 날 스미스필드 회담에서 와트 타일러가 살해되면서 상황은 급변했고, 왕은 군대를 동원해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리처드 2세는 이전의 약속을 모두 철회하며 "농노는 농노로 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381년 잉글랜드 농민봉기는 단순한 조세 저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민중의 고통을 무시하며, 정치적 오만으로 대화의 문을 닫은 지배층에 대한 총체적 불신의 폭발이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실패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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