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의 새로운 도전
카카오가 ‘이프 카카오’에서 15년 만에 카카오톡 전면 개편을 공개하며 요약·추천 등 생성형 AI 기능을 메신저 전반에 넣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음성 통화를 요약하고 대화 맥락 기반 유용 정보를 안내한다. 친구 목록은 인스타그램식 피드로 바뀌고, 숏폼 전용 탭도 신설해 소셜미디어 성격을 강화했다. 공개 범위를 선택해 사생활 노출을 통제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이용자 반응은 냉랭하다. 업데이트 후 친구 목록 접근성이 떨어지고 동선이 복잡해졌다는 불만이 다수 제기됐다. SNS에는 자동 업데이트 차단법이 퍼지며 ‘업데이트 영구 미루기’와 대체 메신저 검토 여론이 생겼다. 다수 이용자는 카톡을 순수 메신저로만 쓰고 싶지, 소셜 플랫폼이 되길 원치 않아 한다. 카카오 경영진은 “일상에 스며드는 편의”를 강조했지만 핵심 사용성 변화가 저항을 키웠다다. 이번 개편은 ‘연결 도구’에서 ‘콘텐츠 플랫폼’으로의 전략 전환이자 기능 비대화 논란을 동시에 촉발시켰다. 향후 이용자 이탈 방지와 UI 복잡도 완화, 개인정보 통제 신뢰 회복이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 여겨진다. 고대 중국의 왕망이 세운 신 제국도 새로운 개혁에 부딪쳐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살펴보자.

혼란한 전한의 마침표를 찍게 만든 왕망
전한 말기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외척들이 황제를 좌지우지하고, 환관들은 권력을 농단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농민들은 절망적인 빈곤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왕망은 처음에는 구원자처럼 보였다. 왕망은 외척 출신이었지만 다른 외척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검소한 생활을 하며 학문에 열심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청렴한 이미지를 쌓았다. 당시 유행하던 유교 이념에 깊이 심취한 그는 스스로를 고대 성왕들의 계승자로 여겼다. 전한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은 어린아이이거나 무능했다. 평제는 왕망이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을 정도로 허수아비 황제였고, 그 뒤를 이은 유자영(영제)은 고작 2살짜리 아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망이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왕망은 더 이상 섭정으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며 국호를 '신(新)'이라고 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왕망을 지지했다. 전한 왕조는 이미 민심을 잃었고,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망의 진짜 문제는 황제가 된 후에 시작되었다. 그는 단순히 왕조만 바꾸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고, 사회 전체를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바꾸려고 했다.

새로운 나라를 위해 개혁을 시도한 신나라
왕망은 《주례》라는 고전에 나오는 제도들을 적용하고자 했다.이는 마치 조선시대의 정치제도를 현대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과 같았다. 더욱 치명적이었던 것은 왕망이 이런 급진적 변화를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사회의 관성과 기득권층의 저항,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적응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왕망은 자신이 성인이고 자신의 정책은 완벽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시대의 잔재이거나 사욕에 눈먼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왕망의 개혁 중에서 가장 파괴적이었던 것은 화폐제도 개혁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화폐제도를 바꿨다. 한나라 때부터 사용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금·은·동·조개껍데기 등을 사용하는 28종류나 되는 복잡한 화폐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정책의 결과는 참혹했다. 장사꾼들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화폐 제도 때문에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늘 받은 돈이 내일은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여전히 익숙한 오수전을 사용하려 했지만, 이는 불법이 되어버렸다. 정부는 오수전 단속에 혈안이 되었고, 오수전을 사용하다 걸리면 중형에 처해졌다. 결국 시장에서는 화폐 경제 자체가 붕괴되고 물물교환이 다시 활성화되었다. 이는 중국 경제를 수백 년 전 상태로 되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토지제도 개혁은 더욱 급진적이었다. 왕망은 '왕전제'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했다. 사적 토지 매매를 완전히 금지하고, 토지는 모두 왕의 소유라고 선언했다. 이는 수백 년 동안 형성된 토지 소유 관계를 하루아침에 뒤엎는 것이었다. 대지주들과 호족들은 수 대에 걸쳐 축적한 재산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일반 농민들조차 이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작은 농지라도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은 이제 그 땅마저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실제 시행 과정에서는 토지 분배 기준이 모호했고, 관리들은 부정부패로 자신들의 배만 불렸다. 결국 왕망은 시행 3년 만에 이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도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왕망은 노예 매매를 금지하고 노예라는 명칭까지 바꿨다. 인도주의적으로 보면 훌륭한 정책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노예에 의존하던 대농장과 수공업장들이 갑자기 노동력을 잃게 되면서 생산이 급감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 정책을 위반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점이다. 왕망의 개혁은 소금, 철, 술까지 국가 전매제로 만들었다.
이는 민간 상업을 거의 완전히 질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인들은 장사할 것이 없어졌고, 수공업자들은 일감을 잃었다. 국가가 모든 경제 활동을 통제하려다 보니 효율성은 급격히 떨어지고 부정부패만 늘어났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왕망이 이런 정책들을 밀어붙이면서도 현실의 피드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책이 실패하면 정책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이 무능하거나 부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엄격한 통제와 처벌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녹림군과 적미군 같은 농민 반란군들이 등장했고, 한나라 황족 출신인 유수(광무제)를 중심으로 한 복고 세력도 힘을 모았다. 15년간의 실험 끝에 신나라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왕망은 농민군에게 살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왕망의 실패는 아무리 좋은 이상이라도 현실을 무시한 채 급격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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