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잘못된 부분에서는 거침없이 비난 쏟아내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전사 회의에서 일부 관리자가 직원들에게 인공지능(AI) 사용을 줄이라고 지시했다는 보고에 “제정신이냐”라고 질책하며 적극적 활용을 주문했다. 그는 “AI가 당장 잘 안 돼도 될 때까지 쓰라”며 직원들이 직접 도구 개선에 참여하라고 강조했고, 사내에서 코딩 어시스턴트 ‘커서(Cursor)’를 이미 활용 중이라고 소개했다. 황 CEO는 AI 확산이 고용을 위협한다는 우려에 대해 “엔비디아는 구조조정 대신 채용을 늘리고 있다”며 일자리 안정성을 약속했다. 실제 직원 수는 지난해 약 2만9600명에서 올해 약 3만6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는 “AI 버블론은 우리가 보는 현실과 다르다”며 “AI의 선순환 구조가 시작됐고 모든 산업으로 퍼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발언은 사상 최대 실적 발표 직후 열린 전체 회의에서 나왔다. 엔비디아의 3분기 매출은 570억1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2% 늘었고, 4분기 매출 가이던스는 약 650억달러로 시장 기대를 웃돌았다. 황 CEO는 “우리는 도구를 고도화할 능력이 있다”며 사내 ‘노-규모(know-how)’를 제품과 업무 현장에 연결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주차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사람을 뽑고 있다”며 공격적 채용 기조를 재확인했다. 과거 세종대왕도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 창제에 나설때 이에 반대하며 평소에 다르게 격분했던 사례가 있었다.

세종대왕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 창제하다
1443년 말,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이 탄생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이었다. 1444년 초 공개된 이 새로운 문자는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설계된 독창적인 문자 체계였다. 당시 조선의 문자 생활은 한자가 지배했다. 하지만 한자는 배우기 어려워 대다수 백성들은 문맹 상태에 머물렀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호소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다.훈민정음은 백성의 문자 생활 향상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한 문자를 통해 일반 백성도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세종의 구상이었다. 이는 단순한 문자 개혁을 넘어 백성 중심의 민본 정치를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훈민정음 창제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됐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오랜 연구 끝에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를 완성했다.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든 자음과 천지인 원리를 담은 모음은 독창성과 실용성을 모두 갖춘 혁신적 발명이었다.

훈민정음에 적대적이었던 최만리에 불같이 화낸 세종대왕
새로운 문자는 곧바로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 7명이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렸다.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당대 대표적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논리는 명확했다. 훈민정음이 한자 중심의 문자 체계를 저해하고 국가 문서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백성에게는 쉽게 읽히겠지만 학문과 국가 질서, 중국과의 사대 관계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한자로 대표되는 중국 문명을 따르는 것이 조선의 정통성이라는 보수적 가치관이 깔려 있었다. 세종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는 상소문에 강한 반박을 가하며 훈민정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백성들이 쉽게 배워 사용할 수 있는 문자야말로 진정한 민본 정치의 도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논쟁 과정에서 세종은 심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상소에 참여한 학자들 중 일부는 옥에 갇히는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곧 풀려났다. 세종은 반대파를 완전히 제압하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집중했다.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책으로 지속 추진됐다. 최만리 상소 사건은 조선 초기 지적·정치적 대립의 상징이었다. 전통적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현실 민생 개선을 우선하는 개혁파의 충돌이었다. 일각에서는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한자음 표기 개혁과 중국 문화 영향 유지에 중점을 뒀다는 평가도 있다.결국 세종의 의지가 관철됐다. 훈민정음은 조선 백성의 문자가 됐고, 오늘날 한글로 이어져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고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한글 창제 과정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개혁의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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