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내지 않으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는 고액 체납자들
서울시 38세금징수과와 국세청 합동수색반이 고액·상습체납자 4명의 가택을 동시 수색해 총 14억 원 상당을 압류했다. 이 가운데 용산 한남동에 실거주하던 법인대표 A씨는 국세·지방세 합계 125억 원을 체납한 상태에서 명품 가방·순금·미술품 등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났다. 수색반은 탐문과 카드 사용 내역 분석으로 은닉 거점을 특정했고, A씨가 드레스룸에 숨은 채 문을 열지 않자 강제 개방 가능성을 고지해 진입했다. 현장에서 에르메스 가방 60점과 순금 10돈, 미술품 4점 등 약 9억 원어치를 압류했으며, 물품은 감정 후 공매 절차에 들어간다. 강남 압구정 실거주지의 체납자 B씨 자택에서는 CCTV 역추적과 가족 동선 분석 끝에 은닉 현금 4억 원을 추가로 적발해 전액 체납액(5억5천만 원)에 충당했다. 합동수색반은 24명으로 구성돼 금융거래 입출금, 재산은닉 혐의정보, CCTV, 공동주택 관리정보 등을 종합 활용했다. 서울시는 해외여행 기록과 골프 스코어카드 등 생활 데이터까지 확보해 ‘무자력’ 주장을 검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38세금징수과는 자치구와 공조해 고액·상습체납자의 실거주지·동선을 추적하는 상시 체계를 운영 중이다. 이번 대상 4인의 누적 체납액은 228억7천만 원으로 파악됐으며 추가 추징도 예고됐다. 시는 “국세청 등과 협력해 비양심적 체납자에 대한 끝장 추적·징수를 지속하겠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소금세를 걷다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는 대내외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베르사유 궁전을 지으며 재정적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민들에게 간접세인 소금세를 걷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 농민이 마을을 벗어나 이웃 마을로 가는 길목마다 검문소가 세워져 있었다. 징세농(Ferme générale)이 고용한 단속원들이 통행인의 보따리를 뒤지고, 마차를 세워 짐을 검사했다. 소금 한 줌이라도 세금 납부 확인서 없이 소지하면 즉각 압류당했다. 나루터와 선착장에도 감시원이 배치되어 강을 건너는 이들의 소금 영수증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 거대한 감시망의 중심에는 징세농이라는 독특한 체계가 있었다. 국왕으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일정 금액에 임차한 이들 청부업자 집단은 수천 명의 검문관과 감시원을 직접 고용했다.
이들은 주요 도로뿐 아니라 외진 마을 입구, 심지어 삼림 오솔길까지 순찰했다. 소금 저장창고(Grenier à sel)에는 모든 거래 장부가 보관되었고, 누가 얼마만큼의 소금을 구입했는지 철저히 기록되었다.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보유하거나 이동하는 이는 즉시 추적 대상이 되었다. 단속원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밀수나 탈세가 의심되면 영장 없이 집안을 수색하고 물품을 압류할 수 있었다. 이 현장 중심의 단속 방식은 장부 대조와 공적 점고에 의존했던 조선의 체납 단속과 달리, 즉각적인 형사력 행사가 일상화된 경찰국가의 모습이었다. 전국에 펼쳐진 이 치밀한 그물망은 영세민과 농민들을 끊임없는 감시와 체포 위험 속에 가두었다. 1784년 기록에 따르면 약 23,000명의 세리와 수천 명의 단속원이 이 거대한 통제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소금세 체납자들이 처한 상황은?
소금세를 체납하거나 밀수로 적발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파멸이었다.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소금과 관련 물품이 압수되었고, 첫 적발만으로도 노동자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300~5,000리브르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대부분의 농민이나 영세민에게 이는 가산을 탕진해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액수였다.재차 적발되면 처벌은 더욱 잔혹해졌다. 공개된 장소에서 체납자의 볼이나 등에 백합 문양의 화인이 찍혔다. 뜨거운 인두로 살을 지지는 이 낙인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치욕의 표시였다. 반복적으로 밀수에 가담하거나 조직적 체납이 확인되면 갤리선 노역형이 선고되었다. 지중해의 전함에 쇠사슬로 묶여 노를 젓는 이 형벌은 3년에서 9년, 심하면 종신형까지 이어졌다. 매년 약 3,000명이 소금세 관련 범죄로 갤리선에 투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직적 밀수단의 두목이나 단속원에게 저항한 이들은 마차 바퀴로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이처럼 금전적,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도로 가혹한 처벌 체계는 민중의 분노를 키웠다. 17~18세기 내내 '소금세 폭동'이 빈번히 일어났고, 밀수 사조직이 전국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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