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 8.15 맞아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종전 80주년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 전쟁의 교훈과 반성”을 언급해, 총리 추도사에 ‘반성(反省)’이 들어간 것은 2012년(노다 내각) 이후 13년 만이라고 현지 유력지들이 전했다.이시바 총리는 별도의 8·15 총리 담화를 내지 않기로 하면서도 공식 행사 연설에서 평화 추구 의지를 강조하는 쪽을 택해 이전 정권들과의 톤 차를 드러냈다.다만 내각 각료 일부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한 사실도 확인돼, 역사 인식 시그널이 엇갈렸다는 평가가 병행된다.
일본 내 정치 지형을 감안하면 이번 메시지는 상징성은 크되, 구체 정책·교과서·기념행사 운용까지 일관되게 이어질 때에만 실질적 변곡점이 되겠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의 악연을 끊기위해 과거사를 명확히 하고 미래로 나아가야한다. 빠른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 산업에 맞서기 위해서도 두 국가는 하나가 되어 미래에 맞서야한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힘을 합쳤던 ‘국공합작’ 사례를 알아보자.

공산당 국민당 치열하게 싸우다
1927년 4월, 상하이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시작된 국공내전은 중국 대륙을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이념을 가진 생사를 건 적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삼민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정부 수립을 꿈꿨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10년간 이어진 내전은 참혹했다. 국민당은 공산당 근거지를 포위하며 "초토화 작전"을 펼쳤고, 공산당은 대장정(1934-1935)이라는 장거리 전략적 후퇴를 통해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양측은 서로를 "반동세력", "공산 반란군"이라 부르며 타협의 여지를 찾지 못했다. 이념의 차이는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섰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중국의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려는 세력으로, 공산당은 국민당을 제국주의와 결탁한 매판 자본가들의 대변인으로 여겼다. 각자의 지지 기반도 달랐다. 국민당은 도시의 상공업자와 지식인층을, 공산당은 농촌의 농민층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했다.치열한 전투 속에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중국은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1936년까지도 양측의 적대감은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그 누구도 이들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공의 적 일본을 상대로 하나가 되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에서 발생한 총성이 모든 것을 바꿨다. 일본군이 중국 전면 침략을 개시한 것이다. 갑자기 중국 앞에는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닌, 제3의 더 큰 적이 나타났다.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실존적 위협이었다. 국민당의 민족주의든 공산당의 사회주의든,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상황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는 그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고, 장제스 역시 "항일이 제1의 과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9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어제까지 서로 죽이려 했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2차 국공합작을 선언한 것이다. 공산당은 국민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했다. 국민당은 공산당의 합법적 존재를 인정하고 공동 항일을 약속했다.이는 단순한 정치적 타협을 넘어선 민족적 각성이었다. "중화민족의 생존"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이념의 차이는 잠시 접어두어졌다. 국민당군과 공산군은 각자의 특성을 살려 일본군에 맞섰다. 국민당군은 정면전을, 공산군은 유격전을 담당하며 전국적인 저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8년간의 항일전쟁 동안 양당은 내전을 중단했다. 물론 완전한 신뢰는 아니었다. 각자 전후를 대비해 세력을 보존하려 했고, 때로는 마찰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그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칠 수 있었다.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이 기적 같은 협력은 끝났다. 공통의 적이 사라지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총부리를 서로에게 겨눴다. 하지만 8년간의 항일전선은 중국 현대사에 깊은 교훈을 남겼다. 극한의 대립 속에서도 더 큰 위기 앞에서는 민족적 단결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공동의 적이 사라지면 협력도 끝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 역사적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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