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 연설에 "닥치고 일본에 투자해" 화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일 도쿄 FII(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연설에서 “됐으니까 닥치고 전부 나에게 투자해(Just shut your mouths and invest everything in me)”라는 만화 ‘진격의 거인’ 대사를 인용해 해외 자본 유치를 정면 호소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경제·식량 안보’와 공급망 강화 등을 앞세워 정부–민간의 ‘위기관리 투자’를 통해 글로벌 자본의 선순환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사우디 등 중동을 겨냥해 일본 콘텐츠의 인기를 언급한 뒤, 만화 대사 차용으로 임팩트를 극대화했다. 연설 말미에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구호 “Japan is back”을 재차 외치며 친(親)투자 메시지를 다졌다. 현장에선 환호와 박수가 나왔지만, “공식석상에서 ‘입 닥치고’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병행됐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 원전 재가동 발언·야스쿠니 관련 강경 발언 등 직설적 화법으로 논란과 주목을 동시에 받아온 인물이다. 총재 선거 직후 “일하고 일하고…”로 요약되는 강한 근로 의지 표명도 화제가 됐다. 이번 연설은 일본의 투자매력 제고와 핵심 광물 확보, 공급망 다변화 같은 ‘경제안보’ 어젠다를 동시 추진하려는 의지 표명으로 해석된다. 과거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기위해 슬로건을 만들어 해외자본 투자에 집중했던 사례를 찾아보자.

"부국강병·식산흥업" 슬로건으로 서구 기술 도입 반대 누르고 급속 산업화 견인
1860년대 후반,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과 불평등 조약으로 위기에 처한 일본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구호를 내걸었다. 메이지 정부가 채택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이 바로 그것이다. 부국강병은 경제 부강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국가 최우선 목표로 삼았고, 식산흥업은 산업 진흥을 통한 경제 발전을 강조했다. 이 구호들은 단순한 정책 목표를 넘어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다. 서구 기술과 기계 수입, 외국 전문가 고용을 필수적 생존 전략으로 포장해 보수 세력의 반발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정부는 중국의 아편전쟁 같은 사례를 들어 "서구 기술 없이는 부국강병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쳤고, 조약 개정을 위한 불가피한 현대화 투자라는 명분을 제시했다. 1870년 산업성 설립을 시작으로 메이지 정부는 인프라 투자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다. 1872년 요코하마와 신바시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었고, 1868년부터 도쿄와 고베를 연결하는 전신망이 구축되었다. 야하타 제철소 착공 등 중공업 육성도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의 기술자 수천 명이 고용되었고, 철도 건설을 위한 영국 자금을 비롯한 외국 차관이 대거 유입되었다.외자와 기술 도입은 자본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인력 양성을 가속화했다. 해외 유학생 파견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미쓰이와 미쓰비시 같은 민간 자본이 산업 클러스터 형성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 철도는 1천 킬로미터 이상 깔렸고, 전신망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제철 생산량도 급증했다.
동북아 강자로 도약한 일본, 슬로건이 만든 기적
철도·통신망 확충으로 국내 시장 통합, 1890년대 연 3% 경제성장 달성하며 메이지 정부의 인프라 투자는 경제 전반에 파급 효과를 낳았다. 철도와 통신망 구축은 지역 간 시장을 통합하고, 생사와 직물 같은 수출품의 해외 진출을 뒷받침했다. 국내 유통 비용이 절감되면서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새로운 산업 기회가 열렸다. 1890년대까지 일본의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연평균 3퍼센트 이상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세계 평균을 크게 웃도는 수치로, 후발 산업국이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경제 성장은 군사력 강화로 이어졌고,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뒀다. 청일전쟁 승리는 일본에게 전환점이었다. 동아시아 지역 질서에서 중국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았으며, 서구 열강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 개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부국강병과 식산흥업 슬로건이 내건 목표가 30여 년 만에 실현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초기 외세 침략 위협 속에서 태어난 두 개의 구호는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서구 기술과 자본 도입을 정당화하고, 보수 세력의 저항을 무력화하며, 전 국민을 근대화 프로젝트에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일본은 비서구권 국가 중 최초로 산업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고, 20세기 초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는 기반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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