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랑 세상 식견/청랑 이슈 식견

중국 ‘훈나오’, 전통의 이름으로 폭력이 된 풍습

by JWS 2025. 10. 13.

변질된 중국 혼례 풍습 훈나오

중국 농촌 혼례 풍습 ‘훈나오(婚鬧)’가 악귀를 쫓고 신랑·신부의 긴장을 풀기 위한 장난에서 출발했으나 최근 성적 굴욕과 폭력성 논란으로 비판이 커지고 있다. 과거 공동체 결속을 돕던 가벼운 희롱은 점차 수위를 넘는 행위로 변질돼 피해가 반복되고 있다. 산시성에선 신부가 여러 남성에게 전신이 묶이는 등 모욕적 장면이 공개돼 공분을 샀다. 지방정부는 저속 풍습 근절에 나서며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산둥성 쩌우핑시는 2021년 공문을 통해 신랑·신부·들러리 괴롭힘을 전면 금지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 가능성을 경고했다. 지방 당국은 “결혼식의 본질은 축복”이라며 모욕·수치 유발 행위를 사회적 해악으로 규정했다. 온라인에선 “재미 명분 아래 폭력이 자행된다”는 비판과 함께 금지 조치 환영 여론이 확산했다. 전통의 명분으로 정당화된 ‘장난’이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자성도 제기됐다. 당국은 자발적 보이콧과 신고를 독려하며 현장 단속을 병행할 방침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축제가 변질되면서 멈춘 사례가 있었다.

전봇대에 묶인 신부를 희롱하는 하객들


중세유럽의 광대 축제

중세 유럽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와 종교적 위계질서로 유지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질서를 일시적으로 전복하는 공식적인 의례를 허용했다.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교회와 도시 공간에서 열린 광대축제(Feast of Fools)는 바로 이러한 '공인된 일탈'의 대표적 사례였다. 광대축제는 주로 성탄절과 신년 사이, 특히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 축일(Feast of the Holy Innocents) 전후에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기간 동안 평소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성직자들이 가면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으로 거리와 교회를 누볐으며, 종교 의식을 패러디하고 풍자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하급 성직자나 부제들이 '바보 주교'나 '바보 대주교'로 선출되어 하루 동안 실제 주교의 역할을 수행했고, 평민들은 귀족의 옷을 입고 권위를 흉내 냈다.

이러한 질서 전도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깊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억눌린 사회적 긴장을 해소하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평소 금기시되던 권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허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기존 질서의 안정성을 강화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집단적 유희를 통해 계층 간 유대감을 형성하고 공동체 통합을 촉진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성을 드러내고 겸손을 일깨우는 교훈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축제의 구체적인 양상은 지역마다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역할 바꾸기'라는 핵심 요소를 포함했다. 교회 내부에서는 성스러운 찬송가를 우스꽝스러운 가사로 바꿔 부르고, 미사 중에 당나귀를 끌고 들어가 동물에게 경배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거리에서는 가면 행렬이 이어졌고, 익살스러운 연극과 노래, 춤이 펼쳐졌다. 음식과 술이 풍성하게 제공되었으며, 평소 금기시되던 신체적 접촉과 성적 농담도 허용되었다.

광대축제는 중세 유럽의 카니발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이 분석한 '카니발적 세계관'은 바로 이러한 광대축제의 정신을 이론화한 것으로, 공식 문화에 대한 민중 문화의 저항과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축제 기간 동안 사회는 일시적으로 '거꾸로 된 세계'가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고정된 질서 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경험했다.


변질된 광대 축제 금지되다

광대축제가 지닌 긴장 해소와 공동체 통합의 긍정적 기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색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축제의 성격이 급격히 변질되기 시작했고, 공인된 일탈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행위들이 빈번해졌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직자들의 도를 넘은 방탕한 행위였다. 단순한 유희와 풍자를 넘어 노골적인 음주와 도박, 음란한 공연이 교회 내부에서 벌어졌고, 일부 성직자들은 창녀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거나 미사 중에 외설적인 몸짓과 노래를 공연했다. 교회의 제단과 성물을 희화화하는 수준을 넘어 훼손하고 모독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파리의 한 기록에 따르면, 성직자들이 교회 제단에서 소시지를 구워 먹고, 성찬식 포도주를 마시며 주사위 놀이를 했다는 사례도 전해진다. 축제 기간의 폭력과 난동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술에 취한 군중들이 상점을 약탈하거나 공공기물을 파괴했고, 개인 간 다툼이 집단 폭력으로 번지는 경우도 잦았다. 질서 전도라는 명분 아래 평소의 원한을 갚거나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축제가 끝난 후에도 질서가 쉽게 회복되지 않아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는 문제가 불거졌다.

이러한 변질에 대해 교회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학자들과 개혁적 성직자들은 광대축제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고 성직자의 권위를 실추시킨다고 주장했다. 특히 파리 대학의 신학부는 1444년 공식 서한을 통해 광대축제의 폐지를 강력히 촉구했으며, 이 축제를 '악마의 의식'으로 규정했다. 교회의 공식적인 규제는 15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다. 1431년 바젤 공의회는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광대축제의 과도한 일탈 행위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축소를 권고했다. 이후 각 지역 주교들은 교구 내에서 축제를 단계적으로 금지하는 주교령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경우 1444년 파리 주교가, 1445년에는 투르 주교가 각각 관할 지역 내 광대축제 개최를 금지했다. 종교개혁은 광대축제의 완전한 소멸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카톨릭 교회의 타락한 관습으로 광대축제를 지목하며 철저한 폐지를 주장했다. 가톨릭 교회 역시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도덕성 회복과 질서 강화를 추구하면서,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교회 내 모든 형태의 세속적 축제와 일탈 의례를 엄격히 금지했다.
17세기에 이르러 광대축제는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부 시골 지역에서 민속 축제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교회의 공식 의례로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동체 통합과 긴장 해소라는 본래의 순기능을 상실하고 과도한 일탈과 폭력으로 변질된 광대축제는, 결국 제도권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관습으로 낙인찍혀 금지되었다. 

청랑이 추천하는 다른 글을 읽고 싶다면 클릭하세요!
 

한국의 소개팅 역사 : 청랑

소개팅에선 사진 통해 외모 확인조선시대 남녀 간의 혼사는 부모님이 결정했다. 이러다 보니 첫날밤에서야 겨우 배우자의 얼굴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다 점차 맞선을 보는 문화

jwsbooks.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