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을 국정감사에 불러낸 국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13일 대법원 국정감사는 조희대 대법원장 증인 채택·이석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가 시작부터 정면충돌했다. 조 대법원장이 관례대로 인사말 후 퇴장을 시사하자 더불어민주당은 그를 ‘증인’이 아닌 ‘참고인’으로 전환해 질의를 이어갔다. 이에 국민의힘은 “대법원장 감금”이라고 반발하며 의사진행 저지를 시도했다. 추미애 위원장은 “대선 개입 의혹 해소를 위한 질의”라고 강조했고, 조 대법원장은 서면답변을 이유로 이석 의사를 재확인했다. 사법부에서는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이석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위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야 간 고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민주당 의원들의 질의가 계속됐으나 조 대법원장은 답변을 자제한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경원 의원 등은 “관례 파괴” “전대미문 국감”이라며 회의 진행 중단을 요구했다. 결국 회의가 잠시 중지된 틈에 조 대법원장은 자리를 떠났고, 현장은 한때 큰 혼란을 빚었다. 이번 사태로 국회의 통제·감시권과 재판 독립 보장 사이의 경계 설정이 핵심 쟁점으로 재부상했다. 이처럼 과거 영국에서도 헨리2세는 종교계를 통제하기위해 사법권을 강화하려 했고 그에 반대하는 그의 절친 베케트와 큰 갈등을 야기했다.

왕권강화에 주력한 헨리2세
1154년 즉위한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국가 통치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고자 했다. 그의 핵심 목표는 분산된 권력을 왕권 아래 통합하고, 법률과 사법체계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특히 헨리는 성직자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교회 재판소에서만 처벌받는 관행을 문제로 보았다. 교회 재판소는 세속 법원보다 관대했고, 성직자들은 사실상 법 밖에 존재했다. 이는 왕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권력의 공백이었다. 1164년, 헨리는 클라렌던 헌장(Constitutions of Clarendon)을 제정하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이 헌장은 성직자에 대한 세속 법원의 재판권을 확대하고, 교회가 독점하던 사법 영역을 국가 통제 아래 두려는 야심찬 시도였다. 헨리의 개혁은 단순히 종교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 전체에서 진행되던 왕권 강화의 흐름이었고, 분권화된 봉건 질서를 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하려는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헨리2세에 걸림돌이 된 토머스 베케트
토머스 베케트는 헨리 2세의 가장 신뢰받는 신하였다. 그는 왕의 수상(Chancellor)으로서 헨리의 정치적 동반자였고,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순간, 베케트는 변했다. 그는 왕의 사람에서 교회의 사람으로 탈바꿈했고, 성직자의 독립과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클라렌던 헌장에 대해 베케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교회 재판권이 세속 권력에 종속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헨리의 개혁 시도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은 이제 양립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갈등은 점점 격화되었고, 베케트는 1166년 헨리의 압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6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두 사람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졌지만, 1170년 베케트는 결국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화해는 없었다. 베케트는 여전히 헨리에게 맞섰고,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분노한 헨리 2세는 측근들 앞에서 "내 신하 중 누가 나를 이 성가신 성직자로부터 구해줄 것인가?"라는 말을 내뱉었다.1170년 12월 29일, 캔터베리 대성당 헨리의 말을 왕의 명령으로 받아들인 네 명의 기사가 베케트를 찾아갔다. 그들은 기도 중이던 베케트를 제단 앞에서 칼로 난도질했다. 대주교는 성스러운 공간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베케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이 분노했고, 베케트는 즉각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1173년, 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캔터베리는 순례지가 되었다. 헨리 2세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베케트의 무덤 앞에서 공개 참회를 해야 했고, 왕권 강화 시도는 좌절되었다. 클라렌던 헌장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교회는 독립성을 지켜냈다.결국 헨리 2세는 권력을 강화하려다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었고, 토머스 베케트는 왕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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