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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진사갈비 명륜당 대부업 논란, 사창제도 악용 역사와 닮았다

by JWS 2025. 10. 4.

명륜진사갈비 가맹점주 고혈을 짜내다

무한리필 돼지갈비 프랜차이즈 ‘명륜진사갈비’를 운영하는 명륜당의 이종근 회장이 가맹점주 대출을 해온 12개 대부업체의 실소유주로 확인됐다. 해당 대부사는 명륜당에서 자금을 빌려 가맹점주에게 연 10%대 중반 고금리로 대출했고, 명륜당은 순자산(837억 원)보다 많은 882억 원을 이들에 대여해 창업을 도왔다. 부족한 운영자금은 명륜당이 산업은행 저리(연 3~4%)로 조달해 메웠고, 금리 차익은 실소유주 측 대부업체로 귀착되는 구조였다다. 이 회장은 12개 중 6곳 지분 100%, 3곳 90%, 1곳 과반을 갖고, 나머지 2곳은 배우자 명의로 보유해 특수관계인 지분이 명륜당 65%를 쥐고 있었다. 명륜당이 채권 회수까지 관여해 ‘등록 없이 대부업 영위’ 논란과 대부업법 위반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는 “대부업 등록 법인이 직접 대여했고 각 사는 독립 운영”이라 반박했지만, 실소유 은닉과 ‘바지사장’ 전·현직 직원 동원 정황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정치권은 규제 회피성 ‘쪼개기 등록’과 미등록 영업 가능성에 대한 관계 당국의 조사와 제재를 촉구했다. 사안의 핵심은 가맹본부–대부업체 간 이해상충, 내부 자금의 고금리 전용, 실소유주 은닉 여부의 법적 판단이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탐관오리가 백성들의 구제하기위해 만들어진 사창제도를 악의적으로 이용해 백성들이 사지에 몰아넣었다. 

명륜진사갈비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창제도

조선시대 사창제도의 출발점은 매우 숭고했다. 춘궁기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국가적 복지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농업 사회였던 조선에서 봄철은 전년도 곡식은 떨어져가고 새 수확은 아직 멀어서 가장 배고픈 시기였다. 특히 연이은 흉년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농민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사창제도는 이런 현실적 문제에 대한 조선 정부의 체계적인 해답이었다. 국가가 미리 곡물을 비축해두었다가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추수가 끝나면 약간의 이자와 함께 돌려받는 시스템이었다. 이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정교한 정책이었다. 환곡 역시 같은 취지에서 시행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운영되는 환곡과 지역 단위로 운영되는 사창이 서로 보완하여 전국적인 구원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관청에서는 춘궁기에 곡물을 대여해주고, 마을 단위의 사창에서는 좀 더 세밀하고 신속한 지원을 제공했다. 

초기 사창제도의 운영 원리는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각 마을이나 지역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곡물을 관리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적정한 이자로 빌려주되, 그 이자 수입으로 제도 운영비를 충당하고 비축량을 점차 늘려나가는 것이었다. 이는 현대의 협동조합이나 상호부조 조직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단순히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민들이 급전이 필요할 때 사채업자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공적 자금을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리대에 의한 몰락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 국가에게는 사회 안정과 세수 확보라는 이중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정책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 제도가 상당히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지방관들도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중요한 치적으로 여겼고, 사창 운영에 있어서도 공익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평성대에는 이 제도가 조선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창제도 출처:역사스페셜


백성들 착취에 악용된 사창제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창제도는 점차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제도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방관과 아전들이 사창을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악용하기 시작했다. 지방관들은 자신의 임기 동안 최대한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환곡과 사창의 대여량을 인위적으로 늘렸다. 실제로 곡물이 필요하지 않은 농민들에게도 강제로 빌려주고, 이를 거부하면 각종 불이익을 가했다. 이는 구휼제도가 아니라 사실상 강제 징수에 가까웠다. 더욱 악질적인 것은 이자율의 급격한 상승이었다. 원래는 연 10% 내외의 적정한 수준이었던 이자가 점차 올라가더니, 후기에는 연 40%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고리대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사채업자들의 이자율과 비교해도 결코 낮지 않은 수준이었다. 국가 기관이 민간 고리대업자보다 더 악랄한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작전대봉'이라는 제도는 이런 착취 구조를 더욱 교묘하게 만들었다. 곡물 대신 돈으로 갚을 수 있게 해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곡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책정하여 농민들이 더 많은 현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쌀 한 가마가 10냥인데, 환곡 상환 시에는 15냥으로 계산하는 식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족징과 인징 제도였다. 환곡을 갚지 못한 농민이 있으면 그의 가족이나 이웃, 심지어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연대책임을 지웠다. 이는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이 공동체 전체의 파탄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농촌 공동체의 결속은 약화되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깊어졌다. 아전들의 부정부패도 극에 달했다. 이들은 장부를 조작하여 실제보다 많은 곡물을 빌려준 것으로 기록하거나, 이미 상환한 곡물을 미상환으로 처리하여 이중으로 받아내는 수법을 부렸다. 또한 좋은 품질의 곡물을 빌려주고 나쁜 품질의 곡물로 상환받거나, 상환 받은 곡물을 시장에 팔아 사적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구휼이 필요한 가난한 농민들은 환곡이나 사창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상환 능력이 의심되는 농민들에게는 애초에 곡물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서 확실히 갚을 수 있는 농민들에게만 강제로 빌려주고 고율의 이자를 받아내는 기형적 구조가 정착되었다.

결국 환곡과 사창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야 했고, 그마저도 부족하면 몰락하여 머슴이나 노예가 되어야 했다.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오히려 백성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런 폐단은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등 대부분의 농민 반란에서 환곡과 사창 폐단이 핵심적인 불만 사항으로 제기되었다.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이 환곡으로 우리를 잡아먹는다"며 분노했고, 이는 조선 왕조의 통치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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