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랑 세상 식견/청랑 이슈 식견

황현희 다주택자 버티면 되겠다는 말에 대동법에 반대한 양반지주들이 보였다

by JWS 2026. 3. 17.

자산가로 알려진 황현희 부동산 정책에 논란일어

'00억 자산가'로 알려진 개그맨 황현희가 방송에서 정부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 "주택을 팔지 않고 버티겠다"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이 일자 SNS를 통해 "판단이 부족했다"며 사과했다. 그는 특정 집단의 편에 서거나 누군가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책과 시장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실을 설명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또 자신은 기본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집값 상승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그는 10일 방송된 PD수첩 '무주택 대통령 vs 다주택자' 편에 출연해 임대사업자이자 부동산 투자자임을 인정하며 "부동산은 보유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번 산 부동산은 최소 10년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고, 다주택자들 사이에 "버티면 된다"는 인식이 형성돼 있다고 언급했다. 해당 발언이 알려지며 온라인 논란이 커졌고, 황현희가 과거 방송에서 서울 용산·성동·영등포 등에 아파트 보유 사실을 언급한 점도 재소환되며 비판과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황현희는 사과문에서 방송이 '다주택'이라는 단어로 몰아가는 흐름 속에서 본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동시에 프로그램 구성과 방향은 제작진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이며, 출연을 결정한 본인이 방송 성격을 더 고민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황현희는 정책을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이 쉬운 선택일 수 있지만 다양한 의견이 공론장에서 논의될 때 정책도 더 나은 방향을 찾는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조선 시대 양반 지주층이 세제 개혁 때마다 "부담 전가–회피"를 반복하며 국가와 조정·충돌을 거듭했던 역사는 지금도 반복 되고 있다.

황현희 출처:스타투데이

토지 과세 강화에 맞선 양반의 저항

조선 초기에는 토지 단위로 전세를 매기는 방식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주층이 토지를 집중 소유하면서도 실제 납세는 소작농·하층민에게 떠넘기는 구조가 강화되었다. 지배 엘리트(사대부·양반 관료)가 토지와 제도 설계 권한을 함께 쥐고 있어서, 세제 개혁이 논의될 때마다 "지주층을 얼마나 과세 대상에 끌어들일 것인가"가 핵심 갈등이 되었다. 대동법은 각 지방 특산물 징수(공납)를 쌀·포·동전으로 통일하고, 실제 토지 보유 규모에 비례해 내게 하려는 개혁으로, 광해군·인조·현종·숙종 대를 거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취지는 "잡세·부역으로 피폐해진 농민을 구하고, 토지 가진 자에게 부담을 돌린다"였고, 이 과정에서 관료·양반 지주들의 토지 소유에 일정하게 부담이 돌아가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대규모 토지를 가진 관료·양반은 공납 대신 쌀·포로 내야 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동법 확대에 거세게 반대했고, 실제 시행 과정에서는 각종 감면·예외·부과 왜곡을 통해 세 부담을 다시 소작농·농민에게 넘기려 했다. 대동법 자체는 "토지 가진 자 과세" 방향이지만, 집행 단계에서는 양반의 회피·변형이 구조적으로 개입했다.

"버티면 된다"는 구조적 전략

영조의 균역법(군역제 개편)은 군포 부담을 줄이고, 대신 토지·어염세·상업세 등에서 재원을 모아 군사비를 충당하려는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양반·부유층 중 군역 회피자에게 군포에 상응하는 포를 부과하고, 토지를 가진 양반·부유 평민·향리에게 "토지에 비례한 곡물 부과(결작)"를 통해 추가 재원을 확보했다. 균역법은 명목상 "군포 2필로 통일"해 서민 부담을 줄였지만, 실제로는 추가 토지세(결작)와 각종 잡세를 통해 지주층에도 일정한 부담을 돌리려 했고, 그만큼 양반들은 토지 명의 분산, 빈농에게 명의만 넘기는 식의 회피, 향촌 지배력을 이용한 재전가를 시도했다. 국가는 군역·조세를 "소득·토지 능력 기준"으로 재편하려 했고, 양반 지주층은 그때마다 새로운 회피·전가 기술을 개발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후기 조선의 세제는 토지세(전세)뿐 아니라 공납, 군포, 각종 잡세·부역이 뒤엉킨 구조였고, 통치층은 반복적으로 "부담을 단순화·통합하고 토지·소득 기준으로 재분배"하는 개혁을 제안했다. 하지만 전세 중심에서 각종 공물·잡세 중심으로 무게가 옮겨간 배경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계층(지주·부유층)의 지속적인 저항"이 있었다. 토지에 직접 세금을 올리려 하면 양반 지주층이 정치권력(당파, 붕당, 상소)을 통해 막거나 완화시키고, 대신 물품·군역·부역 형태로 하층민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유지·강화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18~19세기에는 국가 재정 위기와 농민 피폐가 심화되면서, 토지조사·전세 정비·지주 과세 강화 같은 개혁 구상이 나왔고, 소작농에게만 지워지던 부담을 토지 소유층도 지도록 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실제 집행 과정에서는 중앙·지방 관료와 결탁한 양반 지주층이 장부 조작·명의 세분·장부 누락으로 버텼고, 새 세제가 들어갈 때마다 오히려 소작료 인상·부당 징수로 농민에게 전가되는 일이 잦았다. 이런 구조는 결국 동학농민운동 등에서 "탐관오리·지주·양반에 대한 세 부담·토지 문제"가 핵심 불만으로 폭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