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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 무기 징역 선고, 과거 마그나 카르타가 떠오르는 이유

by JWS 2026. 2. 23.

권력자를 법정에 세운 역사적 순간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과 관련한 내란우두머리 혐의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계엄 선포와 포고령 발령, 군·경 투입 등 일련의 행위가 국헌문란 목적과 폭동 요건을 충족해 내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는 "국회를 봉쇄하고 주요 인사를 체포해 의결을 저지·마비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윤 전 대통령 측이 내세운 이른바 '계엄령' 취지 주장도 동기·명분일 수는 있어도 범행의 목적을 뒤집지는 못한다고 배척했다. 선고 과정에서 재판부는 내란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는 취지로 책임을 엄중히 물었다. 피고인은 선고 직후 한동안 굳은 표정으로 법정에 서 있다가 재판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퇴정했다. 현장 방청석에서는 판결에 반발하는 고성과 환호가 교차하며 혼선이 빚어졌다. 특검은 사실 인정과 양형에 아쉬움이 있다며 항소 의사를 시사했고, 변호인단은 판결을 강하게 비난하며 다툼을 예고했다.이번 판결은 비상계엄을 둘러싼 형사책임을 법원이 본격적으로 인정한 첫 판단으로, 향후 상급심과 관련 재판의 중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최고 권력자가 법정에 서서 법의 심판을 받는 광경은, "왕도 법 아래에 있다"는 원칙이 얼마나 힘겹게 확립되었는지 상기시킨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1215년 잉글랜드 존 왕이 귀족들의 무장 압박 끝에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사건은, 권력자를 법 아래 두려는 시도가 어떤 과정을 초래했는지 알려준다.

선고를 듣고 방청석을 바라보는 윤석열 전 대통령


무장 봉기가 만든 법적 계약

13세기 초 존 왕은 프랑스와의 전쟁 패배로 노르망디를 상실하며 권위가 추락했다. 이를 메우기 위해 과도한 조세·군역 부담, 임의적 벌금과 재판 개입을 남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교황과의 갈등(켄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까지 겹치면서 왕권이 흔들렸고, 결국 봉건 귀족과 성직자, 런던 도시 세력이 연합해 무력 봉기로 이행했다. 1215년 6월, 템즈 강변 러니미드 평원에서 반란 귀족들이 진을 치고 존 왕을 압박했고, 그 결과 왕이 양보하는 형식으로 대헌장에 서명하게 되었다.형식상으로는 국왕이 봉건 영주들에게 부여하는 '왕의 특허장(royal charter)', 즉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한 왕의 약속문이었다. 내용 면에서는 새로운 권리를 창설하기보다는, 귀족·교회·도시가 '원래부터 관습적으로 누려왔다고 주장하는 권리'를 재확인·문서화한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처음에는 철저히 봉건적 문서였고, 주된 수혜자는 대귀족·고위 성직자·'자유민'이었으며, 농노 대다수는 보호 범위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핵심 조항들은 명확했다. 교회의 자유 조항은 잉글랜드 교회가 주교 임명과 교회 재산에 관해 왕의 자의적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했다. 조세·봉건 부담 제한 조항은 새 세금과 봉건 부담(군역, 특수 부담)을 부과할 때 '왕국의 주요 인물들(귀족들)의 자문과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규정했다. 예외적으로 왕의 몸값, 왕자 기사 서임, 왕녀의 혼인 비용 같은 특정 경우에만 동의 없이 부과 가능하다고 제한했다.


봉건 문서에서 헌정 원칙으로

가장 중요한 조항은 적법 절차와 재판 보장이었다. 자유민은 '동등한 지위의 동료들에 의한 합법적 재판' 또는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구금·추방·재산 박탈을 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후대에 특히 39조로 유명). 정의의 판매·거부·지연을 금지해, 왕이 재판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제약하려 했다. 지방 관리 남용 방지 조항은 셰리프와 지방 관리들이 임의로 벌금을 부과하거나 과도한 압류·징발을 행하지 못하도록 절차와 범위를 제한했다. 핵심을 압축하면, "왕은 관습적 권리와 '나라의 법'을 존중해야 하며, 자유민을 자의적으로 처벌하거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는 원칙을 봉건적 언어로 선언한 문서였다. 1215년판 마그나 카르타는 서명 후 곧바로 존 왕이 교황에게 효력 무효 선언을 받아내고, 내전이 재개되는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일단 붕괴했다.

그러나 존이 사망하고 헨리 3세가 즉위한 뒤, 왕은 귀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1216·1217·1225년 등 여러 차례 수정판을 재발급했고, 이 개정판들이 이후 잉글랜드 법질서의 중요한 준거가 되었다. 중세 내내 마그나 카르타는 주로 귀족·교회·도시 특권을 근거 짓는 봉건 헌장으로 기능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명예혁명기에 마그나 카르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았다. 판사 에드워드 코크 등은 마그나 카르타를 "국민의 자유와 의회 권리를 옹호하는 고대 헌장"으로 해석하며, 왕권신수설·전제군주에 맞선 법적 무기로 사용했다. 권리청원(1628), 권리장전(1689) 논의에서 마그나 카르타는 "왕도 법 아래에 있다"는 논리의 역사적 전거로 반복 소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는 귀족·'자유민' 중심이었던 문서가 점차 "국민 일반의 권리"를 상징하는 기초 텍스트로 상징화되었다.

이후 개정판 마그나 카르타는 과세에 앞선 '동의'의 필요, 왕의 권력 제한이라는 원칙을 통해 의회 소집과 권한 확대의 근거가 되었다. "왕 역시 법에 종속된다", "법에 의하지 않은 체포·형벌 금지", "적법 절차" 같은 원칙이 미국 식민지의 권리장전·미국 독립선언, 수정헌법, 세계인권선언·유럽인권협약 등에서 반복적으로 참조·인용되었다. 실제 중세 문서의 내용보다, 그 후 600~800년에 걸친 '법의 지배' 상징으로서의 역사적 수명과 해석의 누적이 마그나 카르타를 세계사적 위상을 가진 텍스트로 만들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처음부터 근대적 "인권 선언"은 아니었지만, 봉건 계약 문서가 시간이 흐르며 "권력은 법에 구속되며, 자유는 양도할 수 없다"는 입헌주의의 상징으로 변모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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