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아진 어버이날 봉투
5월은 잔인한 달이다. 어린이날 장난감을 사고, 영어유치원 월비를 내고, 미술학원과 축구센터 비용을 치른 뒤, 곧바로 어버이날 부모님 용돈 봉투를 준비해야 한다. 40대 직장인 H씨의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공감을 얻은 것은 그것이 특별한 사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3040 세대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구조적 일상이다.수치는 이 체감을 뒷받침한다. 통계청의 2025년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물가를 반영한 실질 소비지출은 전년보다 0.4% 줄었고, 평균소비성향은 68.1%로 높아졌다. 살림 여력이 없다는 뜻이다. 영어유치원 월평균 기본 교습비는 124만원 수준이고, 여기에 차량비와 급식비, 교재비를 더하면 체감 고정비는 더 커진다. 문제는 지출 구조가 비대칭적이라는 점이다. 자녀 사교육비는 "줄이면 아이가 뒤처진다"는 불안 때문에 방어적으로 유지되고, 부모님 용돈은 상대적으로 조정 가능한 항목으로 남는다. 그 결과 3040 세대는 경제적 압박과 함께 부모에 대한 죄책감까지 동시에 떠안는다. 얇아진 봉투는 불효의 증거가 아니라, 한 세대가 위아래를 동시에 부양하기에 이미 생활비 구조가 너무 비싸졌다는 신호다.이 압박이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년 전, 유배지에서 편지를 쓰던 정약용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강진 유배지의 정약용, 위아래를 동시에 부양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된 정약용은 이후 18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정치적 탄핵으로 폐족이 된 가문, 서울에 남겨진 가족, 그리고 자신은 유배지에 묶인 채 편지 한 통으로 모든 것을 관리해야 했다. 그가 보낸 100여 통의 편지는 학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가장이 경제적 벼랑 끝에서 가족을 붙잡으려 한 절박한 지침서였다. 부모 공양과 제사를 유지하면서도 비용을 줄여야 했고, 폐족이 된 자식들에게는 과거 시험 대신 뽕나무를 심고 채소밭을 가꾸는 실학적 생계 교육을 가르쳤다. 스승을 들이는 대신 자신이 직접 쓴 책을 읽히며 "독서만이 살길"이라고 독려했다.그는 큰아들 학연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서울을 벗어나지 말라, 시골로 가면 공부도 경제도 둘 다 잃는다. 돈과 권력을 잃은 집안의 자제는 늘 두 배로 걱정해야 한다. 죄책감과 책임감이 뒤섞인 말이었다. 가문을 위기에 빠뜨린 것이 자신이라는 자책, 그럼에도 자식들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강박이 편지 곳곳에 배어 있다.
봉투의 두께가 효심의 깊이는 아니다
정약용이 처한 상황과 오늘날 3040 세대의 처지는 시대도 다르고 원인도 다르지만, 압박구조는 닮아있다. 위로는 부모 세대를 공양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고, 아래로는 자식 세대를 교육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 사이에 낀 세대는 양쪽 모두를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몫을 줄이고 있다. 정약용은 유배라는 외적 제약 속에서 편지로 버텼고, 지금의 3040은 인플레이션과 교육비 폭등이라는 구조적 제약 속에서 허리띠를 졸라메며 버틴다. 정약용은 제사상을 차리기보다 자신의 책을 읽으라고 자식에게 말했다. 형식보다 실질을 택한 선택이었다. 어버이날 그 봉투의 두께는 부모에 대한 애정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응당 자식으로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돈 이상의 가치를 하는 것이다. 효라는 것은 어버이를 잘 섬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질보다 부모님이 밤새 안녕하신지 알뜰살뜰 챙겨보는 것이 세상에 빛을 보고 스스로 자립하도록 도와준 부모에 대한 인간적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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