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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여성 대통령 성추행 사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아나뇨의 모욕’이 떠오른다

by JWS 2025. 11. 8.

취안이 약한 멕시코 여성 대통령 경호에서도 드러나다

멕시코 첫 여성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이 멕시코시티에서 도보 이동 중 시민과 인사하던 틈에 남성 취객으로부터 목덜미에 입을 대고 상체를 더듬는 성추행을 당했다. 현장 영상에는 경호 인력이 즉각 제지하는 모습과 대통령이 놀란 표정으로 남성의 얼굴을 확인한 뒤 “걱정하지 말라”고 주변을 안심시키는 장면이 담겼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그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고소장을 제출했고, “내가 고소하지 않으면 모든 멕시코 여성이 어떤 처지에 놓이겠는가”라고 엄정 대응 의지를 밝혔다. 여성인 클라라 브루가다 멕시코시티 시장도 “한 명에게 손을 대는 건 모두에게 손을 대는 것”이라며 피의자 체포와 법 절차 진행을 알렸다. 사건 이후 현지 언론은 대통령 경호 체계의 허점과 대중 친화형 동선의 재설계를 동시에 제기했다. 치안 강화론과 여성 안전 의제의 정부 최상위 아젠다화 가능성도 커졌다. 대통령의 신변 접근을 허용하는 ‘열린 경호’와 대중 접촉의 정치적 상징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논쟁이 불가피하다. 성폭력 무관용 원칙과 신속한 사법 절차가 향후 유사 범죄 억지력의 핵심으로 꼽힌다. 야권과 시민사회는 경호 프로토콜 공개 점검과 피해자 중심 수사 지침을 촉구하고 있다. 사건 파장은 여성혐오 근절·공적 공간 안전·경호 표준 개선이라는 세 축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멕시코 첫 여성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누구인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본명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1235년경 로마 남동쪽 아나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교황령의 남작 집안인 가에타니 가문 출신이었으며, 모친은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조카딸이었다. 129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제193대 교황으로 선출되어 1303년 10월 11일까지 재위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설득하여 사임시킨 후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막상 교황이 되자 돌변하여 첼레스티노 5세를 체포하고 구금했으며, 그는 감금된 채 8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이러한 권력 장악 과정은 그가 야심만만하고 권력욕이 강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교황으로 즉위한 후 그는 교황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신비체이며 동시에 자연적 정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사회의 현세적 체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에 지상의 통치권과 하늘의 통치권을 모두 가진다고 강조하며, 교황관을 이중관으로 만들었다.

그는 교회법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남겼다. 역대 교황들의 칙령을 엮어 여섯 권의 책으로 출판하도록 지시했으며, 그 결과 나온 《교회 법령집 제6서》는 오늘날까지도 교회법 해석과 분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1303년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보니파키우스 8세의 재위 기간은 갈등과 충돌로 점철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콜론나 가문을 거의 멸문시키고, 그들이 다스리던 도시와 마을들까지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씌워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군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했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막상 항복하자 죽여버렸다.  이러한 교황권 우위론은 당시 중세 말기의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았다. 봉건제가 붕괴하고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세속 권력은 점점 강화되고 있었다. 


아나뇨에서 모욕을 당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1303년 9월 7일, 중세 교황권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필리프 4세는 기욤 드 노가레에게 명하여 프랑스 군인들을 교황이 머물고 있는 아나니로 급파해서 교황을 생포하는 아나니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얽혀 있었다. 로마에서 콜론나 가문과 보니파키우스 8세가 속했던 카에타니 가문은 적대 관계였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콜론나 가문을 잔인하게 멸문지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살아남은 콜론나 가문 사람들은 복수의 칼을 갈았고, 그 중 시욘나 콜론나가 훗날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결탁하여 아나니에서 보니파키우스 8세를 체포하는 데 협력했다. 교황권의 약화를 노리던 필리프 4세의 입장에서는 떡이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프랑스 왕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콜론나 가문의 복수심을 이용했다.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론나 가문의 가주였던 시욘나 콜론나는 갑주를 입고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한 채 교황의 알현실로 와서는 보니파키우스 8세를 모욕하고 난폭한 행동을 하며, 필리프 4세의 명령으로 당장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격분하여 강력히 거부하자, 원한이 맺힌 데다가 화까지 치민 시욘나 콜론나가 끼고 있던 장갑을 빼어 교황의 뺨을 후려쳤다.

이것이 바로 '아나니의 뺨 때리기'로 불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중세 내내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교황이 일개 귀족의 손에 직접 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후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얻어 맞으며 감금당했다. 교황의 곁에 있던 성직자들도 두들겨 맞았고, 교황과 같이 감금당했으며 교회의 보물들까지 빼앗겼다. 기욤 드 노가레는 폭언과 함께 교황에게 자진사퇴를 종용했으나 교황은 끝까지 사임을 거부했다. 콜로나의 시아라는 교황의 뺨을 때리는 등 폭행을 가하였으며 즉결참수를 주장했다. 교황을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어 놓고 사후처리 방법을 조율하던 중 아나니 시민들이 봉기하자 교황을 풀어주고 퇴각했다. 로마 시민들이 나서서 교황을 구출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후였다. 당시 보니파키우스 8세의 나이는 73세였는데, 노구의 몸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탓에 3일 후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1개월 후에 사망했다.

이를 두고 당시 "보니파키우스 8세는 여우처럼 교황의 지위에 올라 사자처럼 지배하고, 개같이 죽었다"라는 말이 돌았다.아나뇨의 모욕 사건은 단순히 한 교황의 개인적 비극을 넘어 중세 유럽 권력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이 사건은 교황권이 절대적 권위로 여겨졌던 중세 사회에서 최고 권력자조차 대중의 직접적인 힘과 폭력 앞에서는 취약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교황과 세속 권력 간의 갈등에서 세속 권력이 승리한 이 사건은 권력 분립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보니파키우스 8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1세가 8개월 만에 사망한 후 1년 동안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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