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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세상 식견/청랑 이슈 식견

이준석 안철수 관계 리셋, 로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재현?

by JWS 2025. 9. 8.

동지에서 원수 다시 동지가 될 수 있을까?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안철수 의원의 ‘계엄 이후’ 행보가 자신의 노선과 일치한다며 긴밀한 협력 의사를 밝혔다. 그는 대선 전부터 두 사람이 이공계 기반과 정치개혁 지향 등 공통분모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과거 바른미래당 공천 과정의 잡음으로 두 사람은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 이후 미국 유학 시절 이준석 의원의 지인이 안 의원의 사위가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개선되었다고 밝혔다. 개혁신당은 안철수·오세훈 등 ‘탄핵 찬성파’ 국민의힘 인사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종합하면 보수 야권 재편 국면에서 개인적 인연과 정책 방향성을 매개로 한 전략적 연대 구상이 부각되고 있다. 이준석 의원과 안철수 의원의 관계는 고대 로마사에 카이사르와 폼페우스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위대한 역사적 인물의 유대와 적대의 스토리에 대해 알아보자.

(좌)안철수 (우) 이준석 출처:뉴스원


거리감이 있었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인물이 있었다면, 그들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였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정치계의 반골이었다. 독재자 술라가 권력을 휘두를 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굴복했지만 젊은 카이사르는 당당히 항명했다. 술라파에 맞서는 반 술라파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르며, 키케로와 함께 가장 빠르게 정치적 계단을 올라가는 유망주였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명확했다. 기존 권력층에 도전하는 개혁파였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는 술라의 총애를 받는 장군으로, 반 술라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칼날 역할을 해왔다. 군사적 천재로 인정받으며 동방 원정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기존 체제의 수호자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경계하고 견제하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체제에 도전하는 혁신가, 다른 하나는 체제를 지키는 보수파. 술라 시대의 상처가 깊었던 만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거리감도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공공의 적이 생기며 두사람 손을 잡다

그런데 기원전 60년,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손을 잡은 것이다. 여기에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까지 합류하면서 역사적인 '제1차 삼두정치'가 탄생했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뜻밖에도 '공공의 적' 로마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전통적으로 로마를 지배해온 구 귀족 세력으로, 새로운 변화를 극도로 경계했다. 카이사르에게는 집정관 선출을 방해하고, 폼페이우스에게는 퇴역 군인들의 토지 분배를 거부하며, 크라수스에게는 사업상 필요한 법안들을 번번이 좌절시켰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원로원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세 사람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카이사르는 정치적 야심을,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명성을, 크라수스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지만, 모두 원로원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동맹을 굳건히 만든 '정치적 접착제'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다. 개인적 적대감이 있던 두 사람이 혼인을 통해 가족이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정략결혼을 넘어서, 정치적 신뢰를 쌓는 치밀한 전략이었다. 사위와 장인이라는 관계는 두 사람 사이의 의심을 걷어내고 동맹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의 주인을 걸고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싸우다

하지만 정치적 동맹은 영원하지 않았다.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했던 가장 중요한 끈이 끊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크라수스마저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하면서 삼두정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로마에는 두 거대한 권력자만 남았다. 갈리아 정복으로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은 카이사르와 여전히 로마 최고의 장군으로 인정받는 폼페이우스. 둘 다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길 원했지만, 로마는 두 명의 황제를 용납할 만큼 크지 않았다.

결정적 순간은 기원전 49년에 찾아왔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총독직을 포기하고 개인 자격으로 로마에 돌아오라 명령했다. 이는 사실상 카이사르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한때 공동의 적이었던 원로원이 이제는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카이사르를 압박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선택은 극적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는 내전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과거의 사위와 장인, 동맹자였던 두 사람이 이제 로마의 운명을 놓고 칼을 맞댄 것이다. 결국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면서 공화정 로마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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