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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역사 속 해협 통제로 일어난 전쟁은?

by JWS 2026. 3. 6.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경제 압박하는 이란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고위 관계자가 2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는 선박을 공격하겠다고 공개 위협하면서 해협 봉쇄 우려가 급격히 커졌다. 이란 국영방송에서 에브라힘 자바리 소장은 "해협은 폐쇄됐다"며 통과 선박을 "불태울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군사적 차단 의지를 천명했다. 그는 "궁지에 몰렸다는 압박을 느낄 때까지 이 지역에서 석유 수출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며 경제·에너지 차단을 협상 지렛대로 삼겠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남부와 오만 사이의 좁은 수로로,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의 원유·가스 수출선이 집중되는 전략적 요충지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이 해협이 세계 해상 원유 교역과 글로벌 석유 소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초크포인트'라고 설명해 왔다.

이미 안전 우려가 고조된 상황에서 주말 사이 유조선 공격 소식이 전해지며 통항이 사실상 멈춰 섰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바레인 항구에 정박 중이던 미국 기국 유조선이 공격을 받아 작업자 사망과 부상자가 발생했고, 선내 화재는 진화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공격 주체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보험사들이 전쟁위험 담보를 중단하거나 조건을 강화하면서 선사들의 운항 회피가 늘고, 물류·운임·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국제사회는 해협 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원유·가스 공급 차질과 비용 상승이 전 세계 인플레이션과 지정학적 긴장을 재점화할 수 있다고 보고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13~14세기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해상 봉쇄전은, 항만 접근권과 해상로 통제가 어떻게 국가 재정과 경제를 어떻게 피해를 줬는지 알아보자.


항만 접근권을 둘러싼 250년 경쟁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동지중해·흑해를 무대로 치열한 해상 경쟁을 벌였다. 두 공화국 모두 동지중해·흑해에서 이탈리아·서유럽을 잇는 고부가가치 무역(향신료·실크·면직물·노예·곡물)에 의존했고, 특정 항만(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아크레, 카파, 트라브존 등)에 '콜로니아'와 창고·세관 특권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베네치아는 동지중해·레반트·에게해, 제노바는 서지중해·흑해(특히 카파·타나) 쪽 비중이 더 컸지만, 중복 구간(비잔티움·크레타·키프로스·아크레 등)에서 직접 충돌했다. 전쟁은 "상대 함대를 격파 → 상대 상선·콘보이를 습격 → 전략 항만 봉쇄·출입 통제 → 특정 바다(예: 흑해, 다르다넬스) 접근권 제한"의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1261년 니케아 제국·비잔티움이 제노바와 맺은 님파이온 조약은 제노바에 흑해와 비잔티움 항만에 대한 광범한 특권을 주었고, 제노바는 카파·타나 등에서 사실상 반독점적 거점을 형성해 베네치아의 진입을 제약하려 했다. 제노바는 흑해 입구의 해협·항구와, 카파–타나–트라브존–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잇는 해상로에 자국 함대를 집중시켜, 베네치아 상선에 대해 관세·항만료로 압박하거나 분쟁 국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입항·적재를 방해했다.

이에 맞서 베네치아는 비잔티움·헝가리·피사 등과 동맹을 맺거나, 자국 상선을 무장 콘보이로 묶어 제노바 통제 해역을 돌파하면서, 동시에 제노바 상선·무역망을 타격하는 '상대 상권 봉쇄' 작전을 병행했다. 흑해·동지중해는 "누가 어느 항구에 무관세·특권으로 들어가고, 상대에게는 봉쇄·고비용을 강제하느냐"를 둘러싼 정교한 접근권 경쟁장이었다. 1350년대~60년대 '해협 전쟁(War of the Straits)'에서 제노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인근에서 군사력·특권을 이용해 베네치아·비잔티움의 흑해 진출을 제한하려 했고, 타나·아조프해로 가는 통로에서 베네치아 상선 진입을 실질 봉쇄하려 했다. 일정 시기에는 제노바–비잔티움 쪽이 우위를 점하며, 베네치아는 흑해 곡물·모피·노예 공급에 차질을 빚고 동방 재수출 구조에 부담을 겪었다.


봉쇄와 역봉쇄가 반복된 치오자 전쟁

1378년부터 1381년까지 벌어진 치오자 전쟁은 베네치아–제노바 봉쇄전의 극단적인 케이스였다. 초반에 제노바는 헝가리·파도바 등과 제휴해 베네치아 함대를 앞선 해전에서 꺾고, 1379년 아드리아해 깊숙이 진출해 라군 입구의 치오자(Chioggia)를 점령했다. 이로써 제노바·동맹군은 베네치아 라군을 거의 포위하고,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해상 보급·무역을 봉쇄하며 도시 자체에 기아·공황 위험을 가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베네치아 정부는 곡물 비축량이 바닥나고 상선단이 귀항하지 못하면서 재정과 민심이 동요했다. 베네치아는 사상 최대 규모의 동원(강제 대출, 갤리 건조, 시민 징발)로 함대를 재구성한 뒤, 치오자 항구 입구에 일부러 배를 침몰시켜 제노바 함대를 항만에 가둬버리는 역봉쇄를 수행했다. 동시에 카를로 제노의 원정 함대는 티레니아해·에게해·동지중해 전역에서 제노바 상선을 노리고 상업 항로를 교란해, 제노바 상인·국고에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다. 치오자에 갇힌 제노바 함대는 식량·보급이 끊기고, 1380년 여름 대규모 항복으로 이어지며 수천 명의 선원이 포로가 되었다. 같은 전쟁 안에서 "베네치아 라군에 대한 봉쇄"와 "치오자에 갇힌 제노바 함대에 대한 역봉쇄"가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치오자 전쟁과 이전·이후 해상 전쟁으로 두 공화국은 모두 막대한 전비·채무를 떠안았다. 베네치아는 치오자 승리 후에도 트레비소 양도, 테네도스 포기, 헝가리에 연간 공납 등 상당한 양보를 통해서야 평화를 얻을 정도로 재정이 탈진 상태였다. 제노바는 흑해·동지중해 무역망을 유지했지만, 전쟁 채무를 소화하지 못하고 재정 파탄·내분(귀족 파벌 싸움)에 시달리며 이후 점차 장기적 경쟁력에서 밀려났다. 해상 봉쇄와 항만 접근 차단은 단기적으로는 상대 상선단의 손실·보험비용·운임 상승, 중기적으로는 특정 도시를 경유하는 중계무역 감소, 장기적으로는 국가 재정(관세수입·국가 통제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 축소로 이어졌다.14세기 후반 이후 베네치아는 전비 부담에서 회복되는 한편, 국가 주도 상선단 조직을 유지해 재정 기반을 재건했다. 반면 제노바는 내전·파벌정치와 국고 파탄으로 봉쇄전에서 입은 타격을 수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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