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랑 세상 식견/청랑 배경 지식 쌓기

일론 머스크와 샘 올트먼의 폭로전, 로마 삼두정치의 붕괴로 보는 명분의 역설

JWS 2026. 5. 22. 19:00

함께 AI를 만들던 두 사람, 이제 서로의 과거를 법정에서 폭로중

2026년 5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연방법원.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샘 올트먼(Sam Altman)의 소송전이 폭로전으로 번졌다. 시본 질리스(Shivon Zilis)는 증언했다. 머스크가 오픈AI(OpenAI)를 테슬라 산하에 두려 했고, 올트먼을 테슬라 이사회에 영입하려 했다고. 머스크가 지금 "오픈AI가 영리화로 비영리 정신을 배신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그 논리가, 자신의 과거 행적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미라 무라티(Mira Murati) 전 CTO는 녹화 증언에서 올트먼이 경영진 사이에 불신과 혼란을 조성하고 서로 다른 말을 했다고 비판했다. 명분을 내세운 자가 실은 같은 욕망을 가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거룩한 명분'이 '사적인 욕망'과 충돌하며 동맹이 파국으로 치닫는 장면은 2,000년 전 로마에서도 똑같이 연출되었다. 공화정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로마를 통째로 건 싸움을 벌였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오클랜드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샘 올트먼


함께 삼두정치를 했던 두 사람

기원전 60년, 로마.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이 세 사람은 제1차 삼두정치(三頭政治)를 맺었다. 로마 공화정의 권력을 세 사람이 나눠 갖는 비공식 동맹이었다. 카이사르는 군사력과 대중 인기를,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명성과 원로원 네트워크를, 크라수스는 막대한 자본을 각각 나눠가졌다. 그러나 삼두정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크라수스가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했다. 동맹의 균형이 무너졌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만 남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로마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삼두정치(三頭政治, Triumvirate)

삼두정치는 세 명의 유력자가 권력을 나눠 갖는 비공식 동맹이다.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60년)는 법적 근거가 없는 사적 협약이었다. 원로원(元老院, Senatus)의 견제를 우회하기 위해 세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이다. 이 구조의 본질적 취약점은 세 사람 중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두 사람이 충돌한다는 것이었다. 크라수스의 죽음이 그 균형을 무너뜨렸다. 오픈AI에서도 머스크가 2018년 이사회를 떠나면서 초기 동맹의 균형이 깨졌다. 남은 자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루비콘 강을 건넌 자는 누구인가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루비콘(Rubicon) 강 앞에 섰다. 원로원은 명령했다. "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 이 명령을 따르면 카이사르는 군사력을 잃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될 뿐만 아니라 죽음 뿐이었다. 거부하면 반역이었기에 카이사르는 강을 건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넌 명분은 "원로원의 불법적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로마의 패권이었다. 명분과 욕망이 충돌할 때, 역사는 언제나 욕망 쪽을 기록했다.

루비콘 강(Rubicon)의 의미

루비콘은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강으로, 로마 공화정에서 속주(屬州) 총독이 군대를 이끌고 이 강 이남으로 진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이 경계를 넘는 것은 곧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카이사르가 이 강을 건넌 것은 단순한 군사적 이동이 아니라, 공화정의 법적 질서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한 행위였다. 오늘날 "루비콘을 건넌다"는 표현은 되돌릴 수 없는 결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파르살루스, 명분이 아니라 전술이 이겼다

기원전 48년 8월, 테살리아(Thessalia)의 파르살루스(Pharsalus) 평원. 폼페이우스는 수적 우위에 있었다. 약 4만 명 이상의 병력. 카이사르는 열세였임에도 폼페이우스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보병을 밀집시키고 기병으로 카이사르의 측면을 노리는 전술을 펼쳤다. 카이사르는 예비대를 숨겨뒀다가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돌격할 때 측면과 후방으로 투입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무너지자 전열이 붕괴했다. 수적 우위가 전술의 유연성 앞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파르살루스 전투(Battle of Pharsalus, 기원전 48년)

로마 내전의 결정적 전투. 폼페이우스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방어적 전술을 택했다. 원로원의 압박과 자신의 명성을 의식한 소극적 전략이었다. 카이사르는 열세를 알면서도 공격적으로 움직였고, 예비대를 결정적 순간에 투입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전투 이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잘린 머리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이미지 관리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적을 무너뜨리고도 슬픔을 연기하는 것. 권력의 언어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폼페이우스의 죽음 그리고 또 다른 전쟁

파르살루스 이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다. 이집트 귀족들은 계산이 빨랐다. 로마 내전에서 이길 쪽은 카이사르다. 폼페이우스를 살려두면 짐이 된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고 그의 머리를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카이사르는 겉으로 슬퍼했다. 그러나 실질적 위협은 사라졌다. 이집트 귀족들은 승자의 편에 서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더러운 방식으로 충성을 바치는 자는, 언제든 더러운 방식으로 배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죽인 자들을 이집트 권력에서 쫓아내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나일강 전투

결국 기원전 48년,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쿠데타로 클레오파트라는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시리아 접경 지역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 무렵, 로마 내전에서 패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도망쳐 왔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암살했습니다. 그러나 직후 도착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오히려 로마의 집정관이 비겁하게 살해된 것에 분노하며 이집트 왕실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몰래 궁전으로 잠입했는데, 이때 카펫(혹은 침구 주머니) 속에 몸을 숨겨 전달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상대로 나일강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집트 실권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넘어가게 되며,클레오파트라는 인물이 세상에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클레오파트라7세


공화정 막을 내리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이겼다.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소탕하고, 기원전 45년 로마의 사실상 단독 지배자가 됐다. 종신독재관(終身獨裁官, Dictator perpetuo). 공화정의 허울뿐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의사당에서 23번 찔려 암살됐다. 권력을 독점한 자는, 권력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제거되는 역사는 반복된다. 머스크와 올트먼의 싸움은 법정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이 싸움이 끝날 때 쯤 AI 산업에서 어느 쪽이 패배자로 남을 것이다.

 

청랑이 추천하는 다른 글을 읽고 싶다면 클릭하세요
 

삼전닉스가 만든 코스피 1만, 네덜란드병의 역설과 노키아 사례로 보는 경고

카페에서 반도체 이야기는 커피보다 뜨겁다주말 오후 카페. 양옆 테이블의 대화가 반도체와 증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수익률 인증, 수급 예측, 노사 갈등 성과급 분배

jwsmen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