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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경쟁을 보면 19세기 전류 전쟁이 보인다

청랑 배경지식 · 서양 근현대사에서 읽는 오늘의 반도체 경쟁

AI 반도체의 승부는 왜 메모리 하나만 잘 만든다고 끝나지 않을까

삼성전자 HBM4·zHBM에서 만나는 19세기 전류 전쟁과 시스템 경쟁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반도체 경쟁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얼마나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성능의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계산에 필요한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가져오고 다시 내보낼 수 있는지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아무리 강력한 연산장치를 갖추어도 메모리에서 데이터가 늦게 도착하면 연산장치는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한다.

이 문제의 중심에 고대역폭메모리, HBM이 있다. 삼성전자는 HBM4 생산을 확대하는 동시에 HBM4E와 HBM5, 더 나아가 zHBM으로 기술 개발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특히 zHBM이 지향하는 것은 단순히 메모리 칩을 더 빠르게 만드는 데 머물지 않는다. 연산장치와 메모리 사이의 거리를 더욱 줄이고 서로를 더 밀접하게 연결해 데이터가 이동하는 과정 자체를 바꾸려 한다.

여기서 반도체 경쟁의 성격이 달라진다. 메모리 한 종류의 속도만 비교하는 싸움에서 메모리와 연산장치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방식으로 제조하며, 어떻게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을 것인가를 겨루는 싸움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 기술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역량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약 140년 전 미국에서도 이와 닮은 기술 변화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새로운 전구 하나에서 시작했지만 곧 발전소와 전선, 변압기와 전동기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전력 시스템의 경쟁으로 확대되었다. 토머스 에디슨이 추진한 직류 방식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확대한 교류 방식이 충돌했던 이 시기를 흔히 전류 전쟁이라고 부른다.

전류 전쟁의 핵심은 누가 더 뛰어난 발명가였는지를 가리는 데 있지 않았다. 어떤 기술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는지, 여러 장치를 하나의 체계로 묶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실제 고객과 산업이 그 체계를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했다. 이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날 HBM 경쟁 역시 단순한 메모리 점유율 이상의 문제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인다.

HBM 경쟁과 연결되는 전류 전쟁의 다섯 가지 배경지식
이야기의 실마리오늘의 AI 반도체19세기 전기 산업
시스템 경쟁메모리·AI 가속기·파운드리·패키징의 결합전구·발전기·배선·발전소가 연결된 전력 시스템
병목의 해결데이터 이동 거리와 대역폭, 전력 효율직류의 송전거리 문제와 교류·변압기의 확산
보완기술메모리·로직·첨단 패키징을 함께 구현하는 능력발전기·변압기·전동기·특허의 결합
시장 채택차세대 HBM을 실제 AI 시스템에 적용하는 고객시카고 박람회와 나이아가라 발전소의 대규모 실증
산업 생태계점유율·공급망·장기계약·차세대 설계 참여전력망 확대와 규모의 경제, 산업 표준 형성

1. 뛰어난 발명품 하나만으로는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백열전구를 떠올린다. 그러나 19세기 전기 산업에서 더 중요한 변화는 전구 그 자체보다 전구를 실제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든 일이었다. 전구를 켜려면 전기를 생산해야 하고, 생산한 전기를 건물까지 보내야 하며, 사용량을 측정하고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오늘날 AI 반도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빠른 메모리를 만드는 것만으로 전체 AI 시스템의 성능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메모리와 연산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서로 다른 반도체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패키징되는지, 발열과 전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함께 맞물린다.

에디슨 이야기 펼치기 · 전구를 하나의 산업으로 바꾼 시스템의 힘

백열전구가 있어도 전기가 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디슨이 전기조명을 연구하던 시대에는 이미 여러 발명가가 전기를 이용한 조명에 도전하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는 단순히 빛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과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어야 했고, 많은 전구를 동시에 안정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야 했다.

전구를 판매하려면 발전기도 필요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거리와 건물을 따라 보내는 전선도 필요했다. 전기 사용량을 측정하고 비용을 받을 방법도 마련해야 했다. 하나의 발명품이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하려면 그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기술이 함께 준비되어야 했다.

1882년 펄스트리트 발전소는 ‘전구’보다 더 큰 것을 보여 주었다

1882년 뉴욕 맨해튼에서 가동을 시작한 펄스트리트 발전소는 초기 중앙발전 방식의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직류 전기를 주변 건물로 보내고 여러 고객이 전기조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였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발전기 한 대의 성능이 아니었다. 발전소를 운영하고 전선을 설치하며 전기를 공급하고 사용량에 따라 비용을 받는 과정이 하나의 사업으로 연결되었다. 발명품을 사회의 인프라로 바꾸는 순간에는 기술과 생산, 운영과 자본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서로의 가치를 높이는 기술을 보완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발전기는 전구가 있을 때 더 큰 가치를 갖고, 전구 역시 전력망이 있을 때 비로소 널리 사용할 수 있다. 전동기와 전선, 계량기와 안전장치도 마찬가지다. 각각 독립적인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 산업에서는 서로 연결되어야 제대로 기능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보완재 또는 보완기술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한 기술의 가치가 다른 기술의 존재에 의해 커지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의 강자는 하나의 기술을 독점한 기업보다 여러 보완기술을 효과적으로 묶는 기업이 될 수도 있다.

AI 반도체도 점점 하나의 거대한 보완기술 묶음이 되고 있다

AI 가속기에서 HBM이 중요한 이유도 연산장치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메모리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데이터를 주고받는 연결 구조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전체 성능은 제한된다. 반대로 연산장치가 강력해도 충분한 데이터를 공급받지 못하면 계산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그래서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서로 다른 사업으로만 바라보면 차세대 경쟁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각각의 기술을 얼마나 정교하게 연결하여 하나의 완성된 시스템으로 구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진다.

2. 새로운 기술은 기존 시스템의 가장 큰 병목을 바꾸면서 성장한다

기술의 세대교체는 단순히 숫자가 커지는 과정이 아니다. 기존 시스템에서 가장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부분, 즉 병목을 줄일 수 있을 때 새로운 구조가 힘을 얻는다. AI 시대에는 연산 능력의 증가와 함께 데이터를 이동하는 과정이 점점 중요한 병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HBM은 여러 개의 메모리 다이를 수직으로 쌓아 한꺼번에 많은 데이터를 전달할 수 있도록 발전해 왔다. zHBM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메모리와 연산장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더욱 줄이는 방향을 지향한다. 속도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데이터가 지나가야 하는 길 자체를 짧게 만들려는 생각이다.

전류 전쟁 이야기 펼치기 · 직류의 한계와 교류가 바꾼 전기의 이동

직류는 실패한 기술이 아니라 확장 과정에서 제약을 만난 기술이었다

전류 전쟁을 이야기할 때 직류를 낡고 잘못된 기술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도시 전력망에서는 직류도 실제로 작동했다. 발전소와 소비자의 거리가 가까운 지역에서 조명용 전기를 공급하는 데에는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어려움은 공급 범위를 넓힐 때 커졌다. 발전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많은 전력을 보내려면 송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손실을 줄여야 했다. 전기를 사용하는 지역이 커질수록 단순히 발전소를 더 많이 세우는 방식에는 비용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교류의 핵심 장점은 전압을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교류 시스템은 변압기를 이용해 전압을 높이고 낮추기 비교적 쉬웠다. 멀리 전력을 보낼 때는 전압을 높여 전류를 줄이고, 소비지 가까이에서는 다시 전압을 낮추는 방식이 가능했다. 이 구조는 장거리 송전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이러한 장점에 주목해 교류 전력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확대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발전하던 변압기 기술을 도입하고 여러 기술자를 고용했으며, 니콜라 테슬라의 다상 교류와 유도전동기 관련 특허도 활용했다.

거리의 문제가 해결되자 발전소의 경제성도 달라졌다

전기를 더 멀리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편리함을 넘어선다. 한 발전소가 공급할 수 있는 지역이 넓어지면 더 큰 발전소를 건설할 이유가 생긴다. 대규모 발전설비에 투자하고 많은 소비자에게 전기를 판매하는 새로운 사업 모델도 가능해진다.

기술 구조가 변하면 기업의 경제적 선택도 변한다. 발전소를 어디에 건설할지, 얼마나 크게 지을지, 어느 지역까지 시장으로 삼을 수 있는지가 달라진다. 교류는 전기의 이동 방식뿐 아니라 전력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지리적 범위까지 넓혔다.

AI 시대에는 전력의 이동만큼 데이터의 이동이 중요해졌다

19세기 전력 산업에서는 에너지를 멀리 보낼 때 발생하는 손실이 중요한 문제였다. AI 반도체에서는 연산장치와 메모리 사이에서 데이터를 주고받는 시간과 에너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두 기술은 전혀 다르지만 공통된 원리가 하나 있다. 무언가를 이동시키는 비용이 전체 시스템의 한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류 전쟁에서는 전기를 이동시키는 구조를 바꾸면서 산업의 규모가 커졌고, 오늘날 AI 반도체에서는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구조를 바꾸기 위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

3. 산업의 승자는 모든 기술을 혼자 발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류 전쟁은 종종 에디슨과 테슬라 두 천재의 대결처럼 이야기된다. 하지만 실제 산업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에디슨도 혼자 전력 산업을 만들지 않았고, 테슬라도 혼자 교류 산업을 건설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수많은 연구자와 기술자, 기업과 투자자, 제조시설과 특허가 있었다.

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발명의 의미도 달라진다. 뛰어난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는 능력과 그것을 안정적으로 생산해 수많은 고객에게 공급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 현대 반도체 산업에서 연구개발만큼 제조 능력과 수율, 고객과의 공동개발 경험이 중요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 경쟁 이야기 펼치기 · 특허와 제조, 자본이 기술을 산업으로 바꾸는 과정

웨스팅하우스는 필요한 기술을 모으고 연결했다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전력망의 모든 기술을 직접 발명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여러 지역에서 발전하고 있던 교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필요한 특허를 확보하며 기술자를 끌어들였다.

테슬라의 다상 교류와 유도전동기 기술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웨스팅하우스의 사업과 연결되었다. 중요한 것은 최초 발명의 소유자가 누구였는가만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술을 실제 고객이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할 수 있는가가 산업 경쟁에서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전기를 만드는 기술과 전기를 사용하는 기술은 함께 발전해야 했다

발전소가 전기를 충분히 생산해도 이를 사용할 기계가 없다면 전력 산업의 시장은 제한될 수 있다. 공장에서는 공급받은 전기를 기계의 운동으로 바꿀 수 있는 전동기가 필요했다. 테슬라의 다상 교류 시스템과 유도전동기는 이 영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전기와 송전망, 전동기는 서로 다른 기술이지만 실제 산업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발전 능력이 커질수록 전기를 이용할 장치가 필요했고, 전동기의 활용이 늘어날수록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의 가치도 커졌다.

1892년 GE의 탄생은 산업이 개인 발명가의 시대를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전기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 사이의 합병과 특허 경쟁도 치열해졌다. 1892년 에디슨 제너럴일렉트릭과 톰슨휴스턴이 결합하면서 제너럴일렉트릭, GE가 만들어졌다.

이 변화는 한 사람의 천재적인 발명만으로 산업의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거대한 발전기와 전력망을 만들려면 제조공장과 연구소, 영업조직과 금융자본이 모두 필요했다. 발명의 경쟁이 점차 조직과 자본, 생산능력의 경쟁으로 바뀐 것이다.

반도체에서도 통합 능력의 가치는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커진다

차세대 HBM이 연산장치와 더 가까워질수록 메모리 기술과 로직 반도체 기술, 패키징 기술 사이의 경계도 더욱 밀접해질 수 있다. 각각의 기술을 잘하는 것만큼 이들을 동시에 조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한 기업 안에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가능성을 만든다. 실제 경쟁력이 되려면 각각의 조직이 고객의 요구와 설계 방향을 중심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기술의 수가 많다는 것보다 서로 다른 기술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4. 기술은 연구실에서 태어나지만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표준이 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성능 숫자를 비교한다. 몇 배 빨라졌는지, 전력은 얼마나 적게 사용하는지, 이전 세대보다 무엇이 좋아졌는지가 관심을 끈다. 그러나 높은 성능이 곧바로 시장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객의 제품 안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하고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설계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하며 가격 역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결국 기술 경쟁의 중요한 마지막 단계는 누군가가 실제로 그 기술을 선택하는가이다.

시카고와 나이아가라 이야기 펼치기 · 거대한 실증이 기술에 신뢰를 만드는 과정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는 교류 시스템의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는 당시 산업과 과학의 성과를 대규모로 보여 주는 행사였다. 박람회장에는 수많은 전등이 설치되었고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시스템이 전력 공급에 활용되었다.

많은 사람이 직접 교류 전력 시스템이 작동하는 모습을 경험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새로운 기술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과 거대한 시설에서 실제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다르다. 실증은 기술에 대한 불확실성을 낮추고 다음 고객의 결정을 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교류를 대규모 인프라로 보여 주었다

1890년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거대한 수력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려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1895년 웨스팅하우스가 제작한 교류 발전기가 가동되기 시작했고, 이후 생산된 전력은 인근 지역뿐 아니라 버펄로 방향으로 전달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상징적인 이유는 교류가 소규모 조명용 시스템을 넘어 대규모 발전과 장거리 송전에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공적인 대형 프로젝트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다음 발전소와 전력망 투자를 촉진할 수 있었다.

많이 사용되는 기술에는 주변의 산업도 함께 모이기 시작한다

어떤 기술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면 그 기술과 호환되는 장비와 부품도 늘어난다. 기술자들은 그 방식을 배우고 기업은 관련 제품을 생산한다. 고객 역시 이미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네트워크 효과와 산업 생태계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기술을 둘러싼 보완재와 서비스가 늘어나고, 그 결과 다시 새로운 사용자가 유입되는 구조다.

차세대 HBM도 결국 고객의 설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AI 가속기는 수많은 부품과 공정이 결합된 복잡한 제품이다. 새로운 메모리를 채택하려면 단순히 속도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력과 발열, 패키징 구조와 생산 안정성까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

한 번 주요 고객의 제품 설계에 들어가면 다음 세대 기술을 함께 개발할 기회도 생길 수 있다. 반대로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고객의 실제 제품에 채택되지 못하면 대규모 생산과 시장 확대로 연결되기 어렵다. 기술의 완성은 연구개발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실제 시스템에서 선택되는 순간에 가까울 수 있다.

5. 점유율 경쟁의 뒤에는 규모의 경제와 다음 세대의 주도권이 숨어 있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점유율을 회복하는 동시에 HBM4의 비중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 세대의 판매량만이 아니다. HBM4에서 확보한 고객과 생산 경험을 HBM4E와 HBM5, zHBM까지 이어 갈 수 있느냐가 더 장기적인 경쟁을 결정한다.

첨단 반도체는 막대한 선행투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설비와 공정이 필요하고, 수율을 안정시키며 고객에게 정해진 시기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해야 한다.

산업 구조 이야기 펼치기 · 규모의 경제가 기술 경쟁을 장기전으로 만드는 이유

전력 산업은 거대한 시설을 먼저 건설해야 하는 산업이었다

전력 산업은 발전소와 송전선 같은 대규모 시설이 필요하다. 발전소를 건설하고도 전기를 사용하는 고객이 충분하지 않다면 투자비를 회수하기 어렵다. 반대로 많은 고객을 확보하면 하나의 거대한 설비를 여러 소비자가 함께 사용하면서 비용을 나눌 수 있다.

이처럼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평균적인 생산 비용이 낮아질 수 있는 현상을 규모의 경제라고 한다. 고정비가 큰 산업에서는 시장을 얼마나 넓게 확보하는지가 기업의 수익성과 직결될 수 있다.

첨단 반도체 역시 수요가 오기 전에 먼저 투자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과 첨단 생산장비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새로운 제품의 수요가 커질 것이라고 예상하면 기업은 고객의 주문이 모두 확정되기 전부터 연구개발과 설비투자를 시작해야 한다.

투자가 너무 늦으면 시장이 커질 때 공급량을 맞추지 못할 수 있고, 지나치게 빠르면 수요가 기대만큼 늘지 않았을 때 설비 부담이 커진다. 결국 반도체 산업은 미래의 기술과 고객 수요를 예측하면서 현재의 자본을 먼저 움직여야 하는 산업이다.

한 세대의 승리가 다음 세대의 승리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교류 시스템이 전력망의 주류로 성장한 뒤에도 전기 산업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발전기와 전동기, 가전제품과 산업용 장비 등 새로운 시장이 나타날 때마다 기업들은 다시 경쟁해야 했다.

HBM 역시 하나의 세대가 끝날 때마다 경쟁 조건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고객이 요구하는 용량과 속도가 변하고 패키징 구조도 발전한다. 경쟁사 역시 새로운 공정과 제품을 내놓는다. 따라서 HBM4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과 HBM5 이후까지 우위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장기적인 힘은 고객의 다음 제품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가에서 나온다

첨단 부품 산업에서는 단순히 완성된 제품을 납품하는 관계보다 초기 설계 단계부터 고객과 협력하는 관계가 중요해질 수 있다. 고객이 다음 세대 가속기의 구조를 결정할 때 메모리와 패키징 업체가 함께 참여하면 제품 개발 방향을 더 일찍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쌓이면 단순한 판매량 이상의 경쟁력이 생긴다. 고객의 요구를 빠르게 반영하고 생산계획을 미리 조정하며 다음 세대 기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다. 그래서 점유율을 볼 때에도 현재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가뿐 아니라 그 점유율이 어떤 고객 관계와 기술 구조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전류 전쟁이 보여 준 것은 더 좋은 부품보다 더 좋은 연결의 힘이었다

19세기 전기 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의 발명품만으로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인다. 에디슨의 전기조명은 발전소와 배전망을 필요로 했고, 교류의 확산에는 변압기와 발전기, 전동기와 장거리 송전 기술이 함께 필요했다.

각 기술은 따로 존재할 때보다 서로 연결되었을 때 훨씬 큰 힘을 가졌다. 시카고 세계박람회와 나이아가라 발전소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이 연결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고, 고객과 투자자는 그 모습을 보며 새로운 전력 시스템을 선택했다.

AI 반도체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HBM4의 경쟁은 메모리 칩 하나의 속도를 겨루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메모리를 AI 가속기와 얼마나 가까이 배치할 것인지, 서로 다른 칩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할 것인지, 파운드리와 패키징 기술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zHBM이 지향하는 구조가 실제 제품으로 이어진다면 경쟁의 기준은 더욱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메모리를 잘 만드는 기업과 메모리를 연산 시스템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기업 사이의 차이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구조가 발표되었다고 해서 시장의 승자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로 제시된 성능이 실제 양산 제품에서 구현되어야 하고, 충분한 수율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요 고객이 그 기술을 자신의 AI 시스템에 채택해야 한다.

그래서 HBM 경쟁을 이해할 때에는 점유율 숫자 하나보다 더 넓은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기업이 다음 세대의 병목을 먼저 발견했는지, 그 문제를 해결할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 공정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을 수 있는지, 그리고 실제 고객의 선택을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19세기에는 발전소에서 도시까지 전기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새로운 산업의 승부처였다. AI 시대에는 연산장치와 메모리 사이의 몇 밀리미터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거대한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승부처가 되고 있다. 기술의 시대가 달라져도 산업을 바꾸는 힘은 더 빠른 부품 하나보다 서로 다른 기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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